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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136

[에피소드] 침낭 얼마전 친구와 캠핑을 계획하면서 침낭을 사게 되었다. 여름이면 별문제 없지만 겨울로 넘어가는 가을이나 겨울에 캠핑은 조그만 틈으로 들어오는 겨울바람도 온몸을 얼게 한다는 친구의 설명 때문이었다. 문득 군대에서 혹한기 훈련할 때가 생각났다. 군용으로 나온 침낭은 가볍고 보온력이 뛰어나다고 볼 수는 없었다. 군장을 메고 갈 때면 어깨가 짓누르는 침낭의 무게 때문에 침낭만 빼고 갔으면 하는 마음이 수없이 들었다. 하지만 텐트를 치고 겨울바람을 맞고자 흙을 쌓고 텐트 이음새를 단단히 묶어도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 낼 재주는 없었다. 군복을 입은 채로 전투화만 벗고 침낭을 열고 들어가야 꽁꽁 언 몸을 녹일 수 있었다. 정말 얼굴만 내밀고 잔다는 것을 야지 훈련을 가서 처음으로 배웠다. 밤이 길어갈수록 빠르.. 2025. 1. 27.
[에피소드] 작별인사 어린이의 행동거지는 한 달이 멀다 하고 바뀐다. 지난달만 하더라도 현관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할머니의 스마트폰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이제는 옛일이 되었다.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살 살피고는 슬며시 리모컨을 손에 쥔다. 그때부터 노란색 버튼을 누르고는 에 흠뻑 빠져 들어, 옆에서 건드려도 꿈쩍하지 않는다. 이 시리즈는 40여 편이나 되어서 최소 두 시간은 정신을 잃게 만든다. 손자 집에는 케이블TV를 신청하지 않아서 어떻게 배웠느냐고 물었더니, 아빠가 스마트폰으로 보게 했다고 한다. 지난 10월의 TV 시청료가 평소보다 23,000원이나 더 나왔다. 그럴 리가 없어서 통신사에 문의했더니, 대뜸하는 말이 “혹시 지난 추석에 손자가 왔다 갔나요?”한다. 51개월짜리가 비밀번호를 어떻게 알아서 1년치를 결재.. 2025. 1. 16.
[에피소드] 코다리 겨울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고 있다. 간밤에 내린 눈은 꽁꽁 얼어 있다. 처마 밑 고드름은 팔뚝만큼 자라 있고, 문틈으로는 밀려드는 황소 바람은 뺨에 닿는 것만으로도 온몸을 얼게 만들 정도다. 따뜻한 아랫목을 차지하고 있다면 도저히 박차고 나갈 수 없을 정도다. 온도계의 수은주는 위로 오르는 게 힘겨울 정도다. “오늘 점심은 뭐 먹어야 하나?” 엄마의 말에 이불 속에 숨어 있었던 얼굴만 살짝 드러내고 고민했다. 엄마도 고민을 하시는지 한동안 말이 없으셨다. 이윽고 불현듯 생각난 게 있는지 이불을 박차고 몸을 일으켜 세우셨다. 호기심에 어린 눈으로 엄마가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보았다. “코다리 사 놓은 게 있는데.” 코다리! 명태를 말린 생선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가지로 불리는 생선이 흔치 않은데, 명태는 .. 2024. 12. 31.
[에피소드] 갓김치 날이 쌀쌀해지기 시작하면 이런저런 김치들을 하느라 엄마는 분주하게 하루를 보내셨다. 커다란 고무대야에 김치 양념을 넣고 빨간 고무 장갑을 낀 손으로 쓱쓱 버무리고 나면, 맛깔 나는 양념이 뚝딱하고 만들어졌다. 채 썰은 무, 고춧가루, 다진 마늘, 다진 생강, 다진 파, 설탕, 액젓 등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양념들이 빨갛게 하나의 옷으로 갈아입고 김치가 될 재료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렇게 절임 배추를 만나 배추 사이 사이로 스며 들면 걸작품 포기김치가 탄생한다. 엄마는 더 맛있게 한다고 철에 따라 굴을 사다 넣기도 했고, 어떤 때는 황새기젓을, 살이 통통 오른 새우젓을, 시원한 맛을 추가한다며 배나 사과를 갈아 넣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렇다 보니 익지 않은 김치도 그런대로 맛을 내기도 했지.. 2024. 11. 28.
[에피소드] 비눗방울 비눗방울이 꿈과 희망을 안고 날아오른다. 하늘과 가까워지고픈 마음을 안고 두둥실 떠오른다. 문구점에서는 비눗방울 세트를 팔았다. 둥그런 고리를 가진 막대기와 비눗물이 담긴 병이었다. 비눗물 속에 푹 담그고 나면 둥근 고리는 비눗물에 젖었고 ‘호’하며 불어대면 여러 개 비눗방울이 만들어지곤 했다. 어린 동생들은 날아가는 비눗방울을 향해 두 팔을 공중에서 휘휘 저어 댔다. 그러면 나 잡아보란 식으로 비눗방울은 더 높은 곳으로 줄행랑을 쳤다.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는 비눗방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비눗방울이 다 사라지자 동생들은 “또! 또!”를 외쳤고 다시 한번 병 깊숙한 곳까지 집어넣고 막대기를 꺼내 들었다. 더 많은 비눗방울이 만들어졌다. 둥근 고리만으로 비눗방울이 만들어지는 게 그때는 신기하다는 생각을 .. 2024. 10. 31.
[에피소드] 송편 이야기 추석에는 동네에서만 아니라 근동에서도 할아버지께 인사 오는 분들이 많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독자에다 아들만 다섯이어서 일할 사람이라곤 어머니 한 분뿐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어머니는 우리에게 심부름과 잔일을 많이 시키셨는데, 이번에는 송편을 같이 만들자고 하셨다. 어린애부터 고등학생인 나까지 끌어들이자니 아무래도 당근이 필요했다. 말 잘 듣고 끝까지 송편을 빚으면 감추어둔 오징어를 선물로 주겠다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마당 가운데에다 평상을 놓고 둥글게 앉아 가을하늘을 날고 있는 고추잠자리를 보며 송편을 만들기 시작했다. 떼어낸 멥쌀 반죽을 양손으로 비벼 새알처럼 둥글게 만든 뒤, 손가락으로 구멍을 파고 그 안에 깨나 콩 등의 소를 넣고 송편을 빚었다. 처음 각오와는 다르게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트.. 2024. 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