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ommunity/일상다반사

[에피소드] 엄마의 부엌

by 앰코인스토리.. 2025. 12. 22.

사진출처 : 라우드픽

며칠 전, 재종형의 팔순잔치가 있어서 아내와 고향을 찾았다. 한때는 150여 가구가 살던 큰 동네였지만, 수몰로 인해 150여 미터 올라온 야산 위 13가구가 살고 있다. 다행히 내가 살던 곳은 내를 건너 도로 옆의 둔덕에 위치해 있어서 건물은 해체되었지만 물에 잠긴 적이 없어 흔적은 남아있다.

 

집터에서 바라보니 앞산과 뒷산은 숲이 무성하고 본동을 드나들던 외나무다리는 아스팔트 도로로 변했다. 강변을 따라 신축된 10여 채의 펜션이 운치를 더한다. 담장을 따라 늘어져 있던 소 마구간이나 돼지 우리의 흔적도 보인다. 농기구가 버려진 헛간에는 두부를 만들기 위해 콩을 갈던 맷돌도 고개를 내민다.

 

아무래도 이런 곳들보다 내 눈을 오래 붙잡는 것은 아궁이만 보이는 부엌으로, 유년 시절의 추억이 실타래처럼 엉킨 곳이다. 마당을 들어서면서 엄마를 부르며 책보를 벗어 마루에 던지고 곧바로 부엌문을 연다. 아무도 없다. 고요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한 어느 오후의 부엌. 야트막한 부뚜막에는 크고 작은 가마솥 두 개가 걸려 있었다.

 

“얘들아! 밥은 솥에 있고 반찬은 찬장에 넣어 두었고 부뚜막에 된장 끓여 놓았으니 먹고 놀아라!” 이렇게 말씀 안 하셔도 우리는 안다. 엄마와 무언의 약속 같은 것이다. 아궁이에는 늘 잔불이 있어 솥은 따뜻했고 엄마도 커다란 양푼에 밥을 퍼 그곳에 넣어두었다. 덕분에 우리 형제는 솥뚜껑만 열면 언제나 따스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때 동생들이랑 부뚜막에 걸터앉아 먹던 점심 맛을 생각하면 지금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내 가난의 유년, 그 그리움의 중심에 있던 부엌. 나는 늘 빈 공간에서 엄마와 무언의 대화를 했다. 꿈이 불길처럼 타오르기도 꺼지기도 했던 곳, 어느 날 무쇠 솥의 얼룩처럼 남아있는 엄마의 눈물을 우연히 엿보던 곳. 아궁이 앞에 엄마와 나란히 앉아 밥이 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장작불에서 나오는 열기보다 더 따뜻한 온기가 엄마에게서 전해지던, 전율 같은 아득한 그리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리움이 슬프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리움에서는 엄마 냄새가 난다. 가슴 한 편이 따스해 온다.

 

글 / 사외독자 이선기 님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