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139 [에피소드] 처마의 길이 초등학교 시절, 주말이면 가까운 절로 청소를 하러 가곤 했다. 유명한 사찰이다 보니 1년 365일 끊임없이 관광객으로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많은 사람이 오고 가다 보니 사찰 주위가 쓰레기로 몸살을 앓을 수 있기에 우리 고장, 우리 유적지는 우리가 지킨다는 각오로 사명감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조를 나누고 선생님의 지휘 아래 맡은 구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절에 대한 관심보다는 청소의 목적으로 온 터라 사찰을 꼼꼼하게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무심코 마주친 것이 사찰의 처마였다. 그리고 그 처마 안에 그려진 갖가지 그림들을 보면서 새삼 놀라게 되었다. 언젠가 만화책 속에 나왔던 무시무시한 괴물들의 모습과도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왜 저런 곳에 저런 그림을 그려 놓았을까 꽤 궁금하기도.. 2020. 8. 27. [에피소드] 신김치 봄이 되니 몸이 근질근질하다며 낚시를 떠나 버린 선배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고시원 사무실을 지키게 되었다. 올해도 1주일 동안 긴 여행을 떠난 셈이다. 하루 전날에는 이것저것 당부의 말과 함께 집에서 가져왔다며 김치통을 하나 꺼내 보이며 주방 냉장고에 넣어 달라고 했다. 주방의 커다란 냉장고에는 여전히 세 가지 반찬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선배가 가져온 김치통이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그래서 냉장고 안에 있는 김치통을 꺼내어 남겨진 양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보기로 했다. 네 귀퉁이를 열어 김치통 안을 들여다보자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이 양반이 김치를 교체하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어 김치만 주고 갔구먼!’ 낚시 끝나고 돌아오면 한 소리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통을 깨끗이 씻고 김치 교체를 하기 .. 2020. 4. 28. [에피소드] 도너츠 전통시장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간판도 없는 도너츠 가게가 있습니다. 마을버스가 지나는 2차선 도로와 접해 있다 보니 오고 가는 사람들의 눈에는 잘 띄는 곳입니다. 하지만 도너츠 하면 유명 프랜차이즈 업체를 떠올리고 사람들의 발길도 거기로 몰리는지라 아는 이들만 찾는 가게입니다. 정오를 막 넘어가는 시간이 되면 안주인이 예쁘게 빚은 도너츠 모양을 들고나옵니다. 협소한 가게 안에는 도너츠를 구워낼 가마솥을 놓을 자리가 없어서였을까. 인도와 맞닿은 곳에 가마솥이 놓여 있습니다. 맑은 기름으로 가마솥 반을 채운 후, 주인장의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불을 만들면 하루 장사가 시작입니다. 하얀색 반죽이 가마솥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기 무섭게 노란 옷으로 갈아입고 지글지글 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정확한 시계가 없어도 .. 2019. 11. 15. [에피소드] 부채 무더운 날씨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날 지경이다. 이제 초여름인데 30도를 훌쩍 넘어 버리니, 올해 여름은 어떻게 버텨내나 걱정이 앞선다. TV를 틀어보니 유럽도 불볕더위로 몸살을 앓고 있는 모양이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온난화에 대한 경고가 불현듯 떠오른다. 밖은 한낮도 아닌데 벌써 이글거리는 태양의 열기로 가득하다. 외출은 해야 하는데 한 걸음 떼기가 겁부터 난다. 최대한 시원하게 입는다고 차려입었는데도 온몸이 화끈거린다. “빠진 거 없니?” 엄마가 다시 한번 확인 중이시다. “네.”라는 대답을 했지만 이런 더위에는 에어컨을 통째로 들고 다니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엄마는 당신께서 쓰시던 휴대용 선풍기를 쑥 내미신다. “날도 더운데 이거라도 있으면 한결 도움이 될 거야.” 갑작스러운 제안.. 2019. 7. 18. [에피소드] 농구 어린 조카들을 데리고 공원 놀이터에 갔다. 따뜻한 집 안에 있기만 갑갑하다고 해서 야외로 나오긴 했지만, 겨울로 막 들어서는 길목이라 바람이 차가웠다. 꽁꽁 무장시키긴 했지만 코끝에 닿는 공기는 오랫동안 노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기세였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며 공원매점으로 조카들을 유도했고 따뜻한 게 있을지 골라보려 했지만 어린 조카들이 마실 따스한 음료는 찾지 못하고 과자 한 봉지씩만 들고나왔다. 좋아하는 조카들을 데리고 집으로 향하는 순간, 매점 옆 실외 농구장에서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운동복 차림의 학생들이 이 코트, 저 코트를 넘나들며 쉴 새 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멋진 폼은 아니더라도 친구들끼리 어울리는 게 마냥 좋은 듯싶었다. 한때 나도 농구공 하나 들고 이 코트를 자주 찾곤 했다... 2019. 2. 19. [에피소드] 首丘初心 수구초심 어르신 대우를 받은 지도 오래되다 보니, 首丘初心이라고, 젊은 시절의 추억이 불쑥불쑥 돋아나곤 한다. 그러던 차에 지난번 여행에 동행한 부산친구가 초청을 해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은 첫 직장의 사연들이 묻혀있는 장소들을 돌아보기로 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입사시험을 보려고 들어간 D 여고의 교문에서부터 추억을 더듬었다. 그곳에서 횡단보도와 철길만 건너면 바로 첫 근무지다. 늘어나는 수출물량을 채우느라 구내식당에서 세 끼니를 때우며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휴일이라고는 한 달에 하루나 이틀뿐, 20개월간 청춘을 불살랐던 그곳은 상상도 못 한 재래시장의 주차장이 되어 나를 맞았다. 단층의 정미소로 출발하여 필요할 때마다 쌓아 올린 7층 건물은 외관으로는 번듯했지만, 담장 안에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 2018. 9. 21. 이전 1 ··· 7 8 9 10 11 12 13 ··· 2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