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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며


“태, 정, 태, 세, 문, 단, 세, 예, 성, 연, 중, 인, 명, 선….” 중학교 국사시험 괄호 안의 왕을 찾기 위해 외우고 또 외웠던 조선의 왕들. 이것이 나와 조선왕조실록의 첫만남이었다. 첫만남의 설렘은 오답 시험지의 빗줄기처럼 훅 하고 나를 스쳐갔지만, 우연히 시청하게 된 드라마 <용의 눈물>을 보면서 조선왕조실록과의 운명적 만남을 이어갈 수 있었다. 내가 조선왕조실록을 찾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성계도 아니요, 이방원도 아니요, 그렇다고 세종도 아니요, 바로 태종 이방원의 큰아들 양녕대군이었다. 아버지가 피바람을 일으켜 얻은 자리여서 그런지 아님 본인 성격이 자유분방해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세자 자리를 마다하고 온갖 기행으로 아버지의 눈 밖에 나고자 하였으니, 어린 내 눈엔 그런 반항아적인 모습들이 한없이 멋져 보였다. 아니 다른 자리도 아니고 왕의 자리를. 불륜부터 방랑생활을 하며 온갖 비행을 저지르고 다녔으니, 양녕대군이 진정한 조선의 카사노바 아니겠는가. 하지만 양녕대군의 일탈로 죄 없는 사람들이 고초를 겪거나 죽임을 당했으니 자유와 행동에는 책임과 결과가 따라야 하는데 지배계층에 있다고 하여 다 용서되는 일들은 찝찝한 뒷맛을 남겼다.


양녕대군과의 인연으로 읽게 된 박영규의 「조선왕조실록」을 당시 300원짜리 동네 독서실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세 번이나 읽었는데, 읽어도 읽어도 재미있었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조선왕조실록」을 읽고나서 「삼국유사」, 「삼국사기」, 「고려왕조실록」까지 섭렵했으니, 당시 국사시간과 CA역사모임에서는 어깨에 힘이 좀 들어갔었다.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어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갈 때쯤, 조선왕조실록은 한 예능프로의 설민석이란 강사를 통해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추억속에 고이 묻어 두었던 나의 옛사랑의 추억을 다시 떠올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인터넷을 뒤져 만남을 약속하고 다시 만난 그날, 박영규의 「조선왕조실록」이 풋풋하고 조금은 내숭쟁이면서 무뚜뚝했다면 넌지시 바라본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은 세련되고 지적이며 유머에 센스까지. 책 두께로 보아 살은 좀 찐 것 같지만 어찌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선왕조실록은 총 2,077책으로 조선 27대 왕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기록물이다. 그 양이 방대하여 하루 100쪽씩 4년 3개월을 읽어야 하고 차례로 쌓으면 아파트 12층 높이라니,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있는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이 책을 부담스럽고 버겁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무리 요약하고 줄였어도 그 많은 왕들의 이야기를 언제 다 읽고 배우냐고. 난 요즘 영화에 빗대어 이야기하고 싶다. 초중반엔 작품성을 갖춘 천만 관객 이상의 영화들이 주를 이루고(중간 광고로 나오는 왕들, 엑스트라로 나오는 왕 포함) 점점 갈수록 독립영화, 단편영화, 마지막에는 ‘뭐 이런 영화도 있었어?’ 할 만큼 다양한 왕들이 등장한다. 모든 것을 다 보려 하지 말고 취향에 맞게 선택하여 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선택과 판단은 언제나 우리 독자의 몫이니.


사대부의 부패와 무능이 지속되던 고려말 난세에는 언제나 영웅이 탄생하니 바로 그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다. 하지만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기틀을 만들었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의 치마폭에 싸여 결국 1, 2차 세자의 난이 발생한 걸 보면 전쟁 능력치는 최고일 수 있으나 사람을 보는 혜안과 상황판단 능력은 영 떨어지는 것 같다. 오히려 조선건국 프로젝트의 총 책임자이며 태조의 정신적 멘토인 정도전의 역할이 컸다고 본다. 하지만 그 또한 이방원의 칼끝을 피하지 못했으니, 태조를 어찌 원망하지 않을 수 있으랴. 2대 왕 정종 이방원의 들러리 역할을 하다 2년만에 이방원에게 임금자리를 내주고 상왕으로 추대되어 정사에는 일절 관여 안하고 격구, 사냥, 온천 등을 즐기며 목숨을 부지하였다는데, 북한의 김정철이 생각났다. 높은 자리라고 다 편안하고 좋겠는가, 마음이 편한게 제일이지.

3대 왕 카리스마 태종 이방원. 혈육의 피를 통해 왕위를 찬탈한 이방원은 의정부를 폐지하고 호패법을 실시하면서 왕권강화 및 중앙 집권체제를 더욱 공고히 했다. 얼마나 외롭고 또 외로웠을까 아무도 믿지 못하는 자신을. 왕이 되고자 온갖 피바람을 일으킨 장본인이지만 자발적으로 왕위를 물려준 유일한 왕이라 하니 그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조선 최고의 왕. 여론조사시 우리 역사를 통틀어 1, 2등을 다투는 군주 중의 군주. 한글 창제부터 천문학, 의학, 화포기술, 음악, 인쇄술, 신분 차별 없는 인재등용 등, 온갖 좋은 미사여구를 다 붙여도 모자란 왕. 난 반대로 그를 비틀어서 보려 한다. 얼마전 마더 테레사를 비판한 책 「자비를 팔다」를 보면서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세종도 과연 유능하고 어질며 백성을 사랑하기만 왕이었을까를 생각해본다. 사실 세종시기에는 백성이 살기 좋은 시대는 아니었다고 한다. 나라 밖 정세도 불안했으며 부랑자들이 고을마다 넘쳐나고 탐관오리들이 설쳐댔으니, 오히려 사대부들이 살기 좋은 시대였다고 한다. 진짜 태평성대는 경국대전을 편찬한 성종시대 때부터 였다고 한다. 하지만 어찌 그게 왕 하나만의 문제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 했던가. 5대 왕 문종은 문무를 겸비했으며 27대 왕 중 가장 미남이었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알고 배워왔던 측우기도 사실 장영실의 작품이 아니고 문종의 작품이었다니. 허나 아버지의 그늘이 너무 컸던 나머지 세자 생활만 30년을 했고 왕위에 오른 지 2년만에 세상을 떠나 버렸다. 거기에 여복도 없었고 둘째 부인의 동성애 스캔들까지. 아버지인 세종이 22명의 자녀 중 중전인 소헌황후와의 자식이 8남 2녀나 되었다는데 그런 면까지 닮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7대 왕 세조. 그 또한 2대 왕 태종처럼 왕권강화를 위해 호패법을 다시 실시하였다. 국가재정을 확충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였으며 동국통감을 편찬 및 경국대전의 찬술을 시작하였다. 피바람을 일으켜 왕의 자리를 차지했지만 본인 자신도 얼마나 준비를 철저히 했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세조에게는 한명회가 있었다. 계유정난의 시나리오 및 연출을 담당했으며 신하들을 24시 감시 체제 하에 두고 단종 복위를 노린 사육신을 제거하여 공을 세우고 데스노트를 작성하여 반기를 드는 자들을 모조리 참수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하늘의 벌을 받는 법. 한명회도 자신이 지은 정자인 압구정에서의 일로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연산군 때 부관참시 당하며 쓸쓸한 말년을 맞이한다.

9대 왕 성종은 조선의 완성된 법전이자 나라 모든 일의 기준이 되는 경국대전을 완성하였다. 또한 홍문관을 세워 인재를 양성하고 왕과 신하들이 연구하고 경연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였다. 당시 많은 벼슬아치들이 홍문관을 거쳤다 하니, 예나 지금이나 학벌은 무시 못하는 것 같다.


10대 왕 연산군은 조선의 폭군이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설상가상으로 미녀와 기생에 빠져 일등 기녀인 흥청을 선발하기도 하였다. 그중 최고가 장녹수라는 여인인데 연산군을 어린애 다루듯 하였다 하니, 그 기세가 하늘을 찔렀으리라. 결국 조선 최초의 반정인 중종 반정으로 폐위된다.

11대 왕 중종은 반정으로 왕이 되어 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조광조를 등용하여 정치개혁에 착수한다. 허나 신념이 강하고 급진적이었던 그는 중종에게 경연을 강요하였다. 당시 경연은 아침, 점심, 저녁 2시간씩 이루어졌다 한다. 기묘사화를 일으킨 중종은 조광조의 공부에 대한 잔소리가 어지간히 싫었나 보다.


13대 왕 선조는 27대 왕 중 가장 무능한 왕이라는 칭호가 따라다닌다. 붕당정치로 인해 일본 통신사로 파견된 동인과 서인은 딴소리로 일관하고 결국 잘못된 선택으로 16세기 동아시아 최대 전쟁인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15대 왕 두 얼굴의 남자 광해군은 임진왜란의 피해를 극복하고 나라를 안정시켰으나 결국 친형과 이복동생을 죽인 폐륜아로 불린다. 하지만 대동법의 실시로 백성들 조세를 80%나 줄었다 하니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19대 왕 숙종은 광해군때 시작된 대동법을 전국에 시행하고 상평통보라는 화폐를 만들어 농경 중심의 사회에서 상공업중심으로 옮겨가는 기틀을 마련한다. 숙종이 장희빈과 인현왕후를 통해 각 붕당에 권력을 분할함으로써 당파 싸움을 없애고 왕권강화까지 일석이조를 얻는 스페셜 리스트였다 하니 그의 능력에 소름이 돋는다.

21대 왕 영조는 조선 최초의 천민 출신의 왕이었다. 허나 자신의 콤플렉스에 낙담하거나 삐뚤어지지 않고 오직 백성만을 생각했으며 탕평책과 균역법 등을 실시하여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였다. 영조가 41살에 얻은 귀한 아들 사도세자 이선. 어려서부터 천재란 소리를 들으며 자란 이선은 15세가 되면서 아버지 영조와 멀어진다. 모범생 아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운동을 한다고 하니 자신의 꿈을 이루어 줄 아들에게 얼마나 잔소리를 했겠는가. 결국에는 막장 드라마까지 가는 안타까운 일련의 역사적 사건을 보면서 부모와 자식 간의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울 수 있었다. 나도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아이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믿어주며 아이가 하고 싶고 찾고 싶은 것에 대해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을 통해 언급하지 않은 다른 왕들도 업적이 있고 사연이 있겠으나 내가 보기엔 색깔도 분명하지 않고 존재감마저 미비하여 따로 기록하지 않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란 없다.’라는 말처럼 우리의 역사가 고3 수능시험 끝자락의 한 페이지가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이정표가 되어 준다는 것을 다시 한번 배우고 느끼해준 고맙고 감사한 시간이었다.


글 / K4 제조1팀 한주경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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