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만리(千萬里) 머나먼 길에 고은 님 여희옵고
내 마음 둘 듸 업서 냇가에 안자이다
저 물도 내 안 갓도다 우러 밤실 녜놋다
왕방연(王邦衍)의 <천만리 머나먼 길에>라는 시조입니다. 폐위된 단종을 유배지인 강원도 영월까지 호송했던 인물로 단종을 호송하고 돌아오는 길에 지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조선 시조 모음집인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실려 있으며, 임을 두고가야 하는 마음을 자연에 빗대어 감정이입을 시킨 뛰어난 시조입니다. 시조(時調)는 고려 중엽에 발생하여 조선에 걸쳐 완성이 되었으며, 3장 6구 45자 내외로 초장, 중장, 종장 3단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종장의 첫 음절는 반드시 세 글자로 고정되어야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차이코프스키 사계 중 6월 June from Tchaikovsky’s The Seasons
영상출처 : youtu.be/dab0CSg7G0M?list=RDdab0CSg7G0M

시조에는 제목이 딱히 정하는 바가 없어서 후대에서는 첫 구절을 제목으로 표기하기도 합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라는 제목의 이순신 장군의 시조가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잠시 시조창을 감상해 보시지요.
한산섬 달 밝은 밤에, 평시조
영상출처 : youtu.be/UCgIoEyc1QY?list=RDUCgIoEyc1QY
고려 말과 조선 초는 구세력과 신세력이 있던 격정의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의 시조는 당시의 격변의 시대상을 우회적으로 또는 직설적으로 표현합니다.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를 보면 시조의 쓰임새가 칼이나 무기로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이 아닌, 몇 구절의 단어 만으로 치고 받으며 회유하기도 하고, 자존심을 반어법으로 건드리는 촌철살인의 함축적인 당대의 최고의 엘리트들의 말싸움이 였다고 보는데 이견은 없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 들 어떠하리 저런 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 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와 같이 얽혀 백 년을 누리리라
- 이방원 <하여가(何如歌)>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라
- 정몽주 <단심가(丹心歌)>
헨델 하프 협주곡 6번 Handel Harp Concerto in B-flat Major, Op.4, No.6, HWV 294
영상출처 : youtu.be/BNUstgrHIek?list=RDBNUstgrHIek

‘시조’는 한자로 ‘때 시(時)’를 씁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시(詩)와는 다른 작품류로 구분합니다. 문학에서는 구분을 위해 ‘시조시(時調詩)’라고 명칭을 둡니다. 이런 이유는 시조가 읊을 때 창을 곁들이는 점을 적용한다는 데 있습니다. 무반주로 가락을 붙여 노래처럼 시를 읽는 것을 ‘시조창’이라고 합니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넘에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하나니
- 남구만
갓을 쓰고 도포자락을 휘감으며 시조로 창을 읊는 모습은 국악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낯선 풍경은 아닐 겁니다. 조선 시대에는 이와 같이 시조에 가락을 더하여 멋들어지게 읊는 것이 양반들 풍류의 한 켠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하이든 현악 4중주 No.5 세레나데 Haydn String Quartet in F Major, Op. 3, No. 5, Serenade
영상출처 : youtu.be/06PeD1h2hzs?list=RD06PeD1h2hzs
시조의 특징 중 하나인 압축된 단어들의 조합으로 감정을 극대화하는 방식은 현대인이 짧은 시간에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과 통하는 것과 같습니다. 45자 내외의 절제된 단어를 사용하여 짧지만 강렬한 감동을 주는 조선 시대 시조나 스마트폰의 30초 이내의 짧은 영상으로 바쁜 일상에서의 스트레스를 해결하는 현대인과 시대를 뛰어넘는 동질감으로 다가옵니다.

시조가 양반들의 점유물로 애창되고 작품화되었지만, 조선 중기에 들어서면서 여성, 특히 기녀들의 참여가 활발해집니다. 본격적으로 시조에 생동감이 나타납니다. 조선 시대 500년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기녀인 황진이는 스캔들의 주인공이자 흠모의 대상이었으며 시인이자 연주가였습니다. 황진이의 시조를 보면 가식이 득세했던 양반 시대를 조롱하며 신분을 뛰어넘어 벗어나고자 하는 일탈이 묻어납니다.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할제 쉬어 간들 어떠리.
- 황진이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18번 Rhapsody on a Theme of Paganini, Op. 43: Variation18
영상출처 : youtu.be/v9AefQqB97M?list=RDv9AefQqB97M
시조라는 명칭의 본래 뜻은 ‘시절가조(時節歌調)’라는 학설이 있습니다. ‘당시에 유행하던 노래’라는 뜻입니다. 시조를 문학이라는 한 갈래를 만들기보다는 조선 시대의 유행 가요였을 뿐이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영조 4년 김천택이 역대 시조를 수집하여 편찬한 「청구영언」의 시조 998수와 가사 17편을 분류하고 정리한 것을 보면, 우리 고유의 정형시이며 한국 문학사의 한 페이지임에는 틀림없어 보입니다.
드보르작 첼로협주곡 1악장 Dvořák: Cello Concerto in B Minor, Op. 104, B. 191: I. Allegro
영상출처 : youtu.be/o1UkK5jFALY?list=RDo1UkK5jFALY
현대에 와서는 시조는 정형적인 형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저항으로 틀을 깨고 발표되는데, 특히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이러한 시조와 현대시의 과도기적 성격을 보여줍니다. 최남선은 근대문학의 운동가이며 문학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있는 반면, 변절한 친일파로 알려져 있습니다.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따린다, 부순다, 무너 바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나냐, 모르나냐, 호통까지 하면서
따린다, 부순다, 무너바린다.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 최남선 <해에게서 소년에게>

무엇인가에 정형성이 주어지면 이를 깨고자 하는 세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인가 봅니다. 최남선도 밀어 닥치는 신문물의 파도에 꼿꼿이 틀어쥔 상투 같은 고집으로 맞서기보다, 형식을 과감히 잘라버리는 새로움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새로움에 순응하고 적응하는 과감함이 현실의 발전을 가져왔음을 역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짙어지며 농염해지는 여름의 한 구석, 고집스러운 인내를 잘라내고 푸른 바다로 파도를 만나러 가야겠습니다.
※ 사진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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