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간 딸네 봐준다고 일산의 전원주택에 올라와 있는 둘째동생 내외가 외손녀를 데리고 다녀갔다. 사위는 웨딩 촬영 스튜디오에다 예식장 사업으로 영역을 넓히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딸은 대학병원에 장기입원 중인 외손자 돌본다고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한때는 사위가 하는 세 곳의 사업장에서 들어오는 돈이 엄청나다고 자랑하더니, 요사이는 외손자로 인해 어깨가 늘어지고 풀 죽은 모습이 짠하기만 한다.
손자보다 3개월 늦게 태어난 외손녀는 감당하기 어려운 장난꾸러기다. 누가 보나 외할머니 보호 속에 자란 녀석임을 숨길 수 없다. 이 방 저 방으로 뛰어다니면서 서랍이란 서랍은 다 열어젖히고 장식장의 소품들을 끄집어내서 바꾸어 놓거나 숨기고는 그것을 찾는다고 또 법석이다. 손자도 덩달아 신이 나서 하자면 하자는 대로 까르륵~거리며 따라다닌다. 제 할미가 나무라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되돌아 소리 지른다. 서너 시간 놀았는데 집안은 난장판이 되었고 어른들의 혼을 빼놓고 손자까지 울려놓은 채 떠나갔다. 볼펜 하나도 제자리에 있는 게 없고, 딸이 좋아하는 석고상의 목은 어디론지 숨어버렸다.
3주 만에 손자가 와서는 지난번에 즐겼던 행동을 시작하기에 “승하야, 남의 물건을 함부로 손대고 숨기면 안 되는 거야. 내 손자 착하지.” 그러고는 무심결에 유행가 한가락을 흥얼거렸나 보다. 손자는 입을 씰룩거린다. “할아버지, 나빠. 잘난 체하잖아.” 어이쿠, 이거 무슨 책잡힐 짓을 한 건가. “승하야, 할아버지가 잘난 체한 게 뭐지?” 얼굴을 찡그리고 목소리까지 꼬면서 대답한다. “잘 부르지도 못하면서, 야~야야~내 노래가 어때서, 라고 했잖아.”
내가 시도 때도 없이 흥얼거리는 노래에 할머니가 듣기 싫다고 하는 말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승하야, 잘난 체하는 건, 지난번에 다희가 와서 물건을 흩뜨려놓고 팔씨름도 잘못하면서 모두를 이긴다고 자랑하고는 너한테 졌잖아. 그게 잘난 체하는 거란다.” “나한테 이긴다고 하고는 진 게 맞아.” “앞으로는 할머니가 싫어하는 노래를 부르지 않으마.” 아내가 수도 없이 잔소릴 해도 고치지 못한 버릇을 유치원생인 손자의 한마디에 고치겠다는 각오가 머리 깊숙이 입력된 것 같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손자가 오는 날은 반주를 즐기는 날이기도 하다. 자식도 출가하여 가끔 오면 손님이라고 하지 않던가. 평소에 잘 올라오지 않던 육류에다 생선회도 빠지지 않으니, 지병이 걱정되는 몸이지만 무언가 허전해서 가슴을 달구려고 하는 짓이다. “술은 가급적 안 드시는 게 좋지만, 드시려면 알코올 도수가 높은 위스키 같은 것으로 한두 잔만 하세요.” 하던 의사의 권고에 따라 고심해서 고른 게 45도의 안동소주다. 우리 음식과 궁합이 맞는 데다 전통증류방식의 쌀 소주라서 그런지 온몸이 짜릿해지는 독주라도 뒤끝이 깨끗한 게 마음에 들었다. 두잔 정도 마시면 알딸딸해져서 손자가 갈 때까지 같이 뛰고 뒹굴어도 피곤한 줄 몰라서 좋다.
그런데 빠른 게 시간이라지만 손자와 노는 날은 왜 이리도 빠른가. 한때는 저녁을 먹고 나면 곧바로 엄마한테 가자고 조르던 녀석이, 요사이는 애비와 한바탕 실랑이를 벌인다. 겨우 달래서 시계를 가리키며 30분을 더 있다가 8시에 가는 손자가 더욱더 사랑스럽다.
글 / 사외독자 이종철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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