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을 찾았다. 구석에 던져 놓았던 운동화에는 묵은 거미줄과 먼지가 잔뜩 끼어 있었다. 벽에 대고 탁탁 터니 달걀 속껍질 같던 머릿속이 좀 개운해졌다. 지갑부터 챙겼다. 화원에 가려고 나서면 불현듯 잊고 있던 일이 떠오르곤 한다. 돈에 관한 실랑이라기보다는 맑은 물길을 따라 봄날 한가운데를 흘러가는 지폐 한 장과 그 결에 출렁이는 잊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길을 나선 팔월의 시드니는 겨울 막바지이며 봄의 초입이다. 꺾여 있던 마른 꽃대들이 스러져가고 마당은 남편 정수리처럼 빈자리가 숭숭 보인다. 장작불을 피어 놓고 집안에서만 두어 달 서로 치대다 보니 좀이 쑤시기도 했다. 화원에 좀 다녀오겠다고 했더니 같이 가자며 따라나선다. 이왕 나선 김에 블루마운틴 자락으로 멀리 나가보자 욕심을 낸다. 훈훈해진 바람결이 산으로 밀어내기 때문이었다.
그날도 이맘때였을 것이다. 마운틴 윌슨을 한번 가보자고 작정하고 나섰다. 가는 길은 생각보다 다정했다. 어떤 집은 이미 봄 단장을 끝낸 듯 붉은 철쭉이 나지막이 띠를 두르고 한곳에 모여 앉아 있었다. 마른 풀이 뒤덮인 쿠라종 언덕을 오르고 연초록 눈망울들이 막 트기 시작한 빌핀 사과농원을 지나 목적지에 도착했다. 묵은 겨울을 털고 싶은 나 같은 사람들이 하나둘 차에서 내려 걷고 있었다. 길 끝에 자리 잡은 널찍한 화원 앞에 차를 세웠다. 핸드백은 차에 두고 오십 불짜리를 한 장 꺼내 주머니에 쑥 집어넣고 내렸다.
화원은 그때까지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봄 설거지는커녕 일손이 부족했는지 깨진 화분과 잡초들이 무릎까지 차오른 쑥대밭도 군데군데 보였다. 맘에 드는 화초가 눈에 들어와도 화분 사이를 이리저리 비집고 들어가야 만질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눈에 띄었다. 불끈 들어 올리니 작은 진주알 같은 꽃망울들이 젖니처럼 돋아 있었다.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후크시아라는 꽃이었다. 삼십 불이라고 붙어 있어 차에서 가지고 내린 돈으로 충분했다. 품에 안고 입구에 있는 계산대 앞으로 오니 금발머리를 틀어 올리고 연한 핑크색 스웨터를 입은 내 나이쯤 보이는 백인 여자가 미소로 맞아주었다. 환한 얼굴로만 봐도 영락 꽃집 주인일 것 같은 인상이었다.
꽃 이름과 개화 시기를 물으니 꽃이 활짝 핀 것도 있다며 가져와 보여주었다. 어떤 게 나을지 잠시 고민하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머니가 썰렁했다. 이 주머니 저 주머니 다 뒤집어 봐도 오십 불이 보이지 않았다. 화분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돌던 자리를 다시 한번 돌았다. 사람들이 북적대지 않았으니 다니던 길 어딘가에 꼭 있을 것만 같았다. 경황없이 두어 바퀴를 더 돌았는데도 지폐는 어디 박혀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주인에게 돌아가 미안하다며 다음에 사러 오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 집에서 잃어버렸으니 꽃을 그냥 가져가라고 했다. 무슨 소리냐고 그럴 순 없다고 했더니 괜찮다고 웃었다. 나 역시 당황해서 괜찮다고 정말 괜찮은 얼굴로 웃었다. 주인은 더 환히 웃으며 포장까지 하면서 화분 사이에서 돈이 나오면 연락하겠다고 했다. 내 영어 실력으로는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내 영어 이름도 적어 주면서 이름을 물으니 자넷이라고 했다. 찜찜한 마음으로 화분을 가슴에 안고 차로 돌아왔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고 이런 사람도 만나는구나, 기분이 좋다기보다는 어리둥절했다. 내가 그녀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나도 그녀처럼 한순간 망설임 없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돌아오는 길에 빌핀 사과농장 근처에 차를 세웠다. 줄을 서서 애플파이와 주스를 시켜놓고 나무 테이블에 앉아 있는데도, 주문한 파이가 나오고 뜨끈한 한 조각을 씹고 있는 중에도 화분을 건네주던 자넷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환한 이마며 고개 숙일 때의 다소곳한 자태는 딱 후크시아 한 송이었다.
봄이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었다. 점점 더운 바람이 겹치며 땅바닥이 후끈 달아올랐다. 부엌 창문 앞에 둔 후크시아는 열렬하게 피고 졌다. 꽃말조차 ‘열렬한 마음’이다. 매일 물 주는 것만 잊어버리지 않으면 발레복을 입은 소녀들이 벙긋벙긋 매달리는 모습에 보는 즐거움이 배가 될 것이다. 행동이 굼뜬 나 같은 사람이 키우기에도 무리 없는 종류였다.
그러던 한 날, 운전 중인데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이름조차 가물거리는데 자넷이라고 하며 마운틴 윌슨 화원이라고 했다. 내 꽃을 닮은 바로 그녀였다. 계절이 바뀌면서 화원을 정리하다가 화분 틈에서 오십 불을 발견했으니 이십 불을 찾아가라는 것이다. 이번에도 같은 말법이다.
- 그레이스, 제발 찾아가요.
- 자넷, 정말 정말 괜찮아요.
‘찾아가라 괜찮다, 찾아가라 괜찮다’ 몇 번 같은 말이 오가다가 다음에 만나면 커피 한잔하자는 걸로 겨우 합의를 봤다. 전화를 끊고 한참이 지나도 달아오른 얼굴이 식지 않아 차 유리문을 내렸다. 바람이 좋은 건지 사람이 좋은 건지 그저 웃음만 나왔다. 그 후로 일부러 갈 일이 없어서 그녀에게 가는 일은 먼 일이 되어버렸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 사이에서 맑은 물소리가 흐르면 잘 기억해두었다.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을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걷는 길에도 이런 물길이 흐르도록 귀를 늘 열어두도록 애썼다. 더러는 흙탕물이나 구정물이 고여 가슴앓이를 할 때도 ’항상‘이라는 말이 큰 손바닥이 되어 지친 등을 힘껏 밀어주었다. 가끔 소모임에서 이 시를 낭송할 때가 있었는데 이 부분에 다다르면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멀리 보내며 눈을 질끈 감곤 했다. 양어깨를 으쓱하며 환하게 웃던 그 고운 사람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 마종기 시인 시 <우화의 강>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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