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겨울의 추위가 한참 기승을 부릴 때 막냇동생은 TV 홈쇼핑을 통해 열풍기를 구매했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열풍기 인기가 사그라들자 동생의 창고 방에 쓸쓸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게 안타까워 동생을 졸라 두 개를 가지고 왔다. 딱히 필요하겠나 싶었지만 혹시라도 쓰임새가 있을 듯싶어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아두었다. 까만 봉투 안에 담겨 한여름과 시원한 가을을 보내는 바람에 한동안 열풍기 생각을 까맣게 잊었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밤, 창틀을 막아도 비집고 들어오는 겨울바람에 몸도 마음도 추워 눈만 내놓고 자야 하는 순간이 오자, 잊고 있었던 열풍기가 떠올랐다. 히터나 난로와 비교하면 너무 작아 힘이나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한번 써보자는 마음으로 까만색 열풍기를 콘센트에 꽂았다. 처음 듣는 요란한 소리에 이걸 과연 계속 사용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기다려 보기로 했다. 형광등을 켜면 제대로 밝아지기까지는 꽤 시간이 흘러야 하는 것처럼, 열풍기 소리도 시간이 지나면 조금은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1분 정도 지나자 윙윙거리며 탱크 소리를 내던 열풍기는 차츰 소리의 높이를 낮춰갔다. 참 다행이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크지는 않은 열풍기 안에서 꽤 많은 양의 따스한 온기가 내뿜어졌다. 방 안 차디찬 공기가 열풍기 열과 뒤섞여 더운 공기를 만들고 있었다. 물을 데우면 순환하면서 윗물과 아랫물이 함께 더워지는 것처럼 추운 겨울바람이 밀어 넣었던 차디찬 공기가 더운 공기의 등장으로 서서히 밀려 나가는 것만 같았다.
언젠가 읽었던 <성냥팔이 소녀>라는 동화가 생각났다. 성냥팔이 소녀가 자신이 팔던 성냥을 하나씩 켜면서 따스함을 갈구했던 것처럼, 나는 열풍기를 가지고 추운 겨울밤과 맞서고 있는 기분이었다. 작은 방 안에 촛불을 하나만 켜도 방안이 환해지듯, 방 안에 열풍기도 못지않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기상은 5시. 찬 겨울의 이른 기상은 참 싫다. 이불 밖으로만 한 발을 내밀어도 극한 체험을 하는 기분이 든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이 있기에 마지못해 일어나야 하고, 옷을 주섬주섬 입고 또 껴입어도 옷 사이사이로 파고드는 겨울바람을 막기가 어렵다. 늘 하는 일이라 해야 하지만 빗자루를 잡고 집 안팎을 쓸고 나면 손과 발은 금세 얼어 버린다. 그렇다고 시작을 한 일을 마무리하지 못하는 건 싫어서 마무리까지 하고 나면 그야말로 손과 발은 무감각해지고 만다. 얼른 녹여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펄펄 끓는 물이라도 한 바가지 끼얹고 싶은 심정이다.
방 안으로 들어간다. 어디에서 녹이면 제일 나을까, 이불을 깔아놓은 방바닥에 손을 밀어 넣으면 나을까, 고민하다 열풍기가 생각났다. 강렬한 빨간색을 띠며 열심히 돌고 있는 열풍기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한발 올려 열풍기에 갖다 대보았다. 얼었던 발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든다. 다른 쪽 발도 재빨리 녹인다. 피가 도는 느낌이 든다. 행복감마저 든다.
어린 시절, 추운 겨울이면 연탄을 땐 적이 있었다. 밖에 한참 뛰어놀다 보면 양말이 축축하게 젖은 줄도 몰랐다. 그럴 땐 제일 먼저 향하는 곳이 연탄불을 피워 놓은 아궁이였다. 신발을 벗고 양말 채로 연탄에 가져다 대면 순식간에 따스한 온기를 전해 받았었다. 물론 시간을 잘 맞춰서 양말을 때워 먹어서 엄마한테 혼나기도 했다.
열풍기에 손발을 녹이고 나니 한결 활동하기가 편해진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닌 듯싶다. 추운 겨울은 아직도 한참 남아있다. 열풍기와 한참 더 같이해야 할 것 같다. 이번 겨울에는 열풍기가 훌륭한 효자 노릇을 할 듯싶다.
글 / 사외독자 한상대 님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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