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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요리와 친해지기

[와인과 친해지기] 샤또 딸보(Chateau Talbot), 그리고 인연

by 앰코인스토리 - 2014. 12. 30.

해외 파견 기회가 주어져 2년 동안 필리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짧지 않은 기간이라 그동안 와인 생활을 하면서 알게 되었던 몇 분의 지인들과 아쉬운 작별모임을 가졌다. 와인카페 매니저인 ㅇㄱ 님을 통해서 알게 된 ㅈㄱ 님, ㅂㅂ 님, ㅈㅇㅇㅃ 님은 모두 형님 뻘이고 사회적 지위도 높으신 분들이지만, 와인이라는 공통언어가 있기 때문에 스스럼없이 종종 만나고 있었다. 모임 장소를 어디로 할까 고민하다가 화양동 이모네 집으로 정했다. 이모네 집은 10년 넘게 다녔던 단골집으로, 비싼 가격과 이모님의 까칠한 대접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보다는 싫어하는 사람이 더 많지만 회나 미역국, 과메기 맛은 전국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내게는 소중한 맛집이었기 때문이었다.


BYOB(Bring Your Own Bottle) 모임이라 회와 과메기에 어울리는 와인을 준비해야 했는데, 꼭 가져가고 싶은 와인이 하나 있었다. 그 와인은 바로 나를 와인의 세계로 안내한 첫 사랑, 샤또 딸보(Chateau Talbot, 2005빈티지. 보르도 그랑크뤼 4등급). 모임에 가져갈까 말까 상당히 고민했다. 셀러가 없는 우리 집에서 7년이나 묵혀 있었기에 올빈의 느낌이 날지도 모르겠고, 이것이 과메기와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와 함께 첫사랑의 와인이 7년 동안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지 궁금했다. 클라우디 베이 소비뇽 블랑(Cloudy Bay, Sauvignon Blanc) 1병도 기본 와인으로 준비하고 깜짝 게스트로 딸보를 넣었다.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일찍 모두 모였다. 각자 한두 병의 와인을 준비한 터라 4명이 무려 7병의 와인과 1병의 사케를 만나게 되었다. 이모님이 미리 숙성시켜둔 자연산 우럭회를 두툼하고 큼지막하게 썰었고 3년 된 묵은지를 함께 내왔다. 처음 이 요리를 접했을 때에는 ‘무슨, 회를 김치에 싸먹나?’ 의아했었지만 이내 그 걱정은 엄청난 감탄사로 바뀌었다. 회와 묵은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듯한 조합이지만, 오래된 묵은지의 감칠맛이 담백한 우럭회와 너무도 잘 맞아서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 두툼한 자연산 우럭회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동해안 돌문어! 살짝 데쳐서 내오는데 야들야들 씹히는 맛이 일품이고 이거 한 마리 먹으면 속이 다 든든하다. 특히 소주 한 잔 마시고 싶을 때 가볍게 먹기도 좋은 안줏거리다.


▲ 동해안 돌문어


그리고 이날의 주요리인 포항 구룡포 과메기! 여느 과메기와는 달리 현지인들이 정성을 들여서 말린 것으로, 비린내도 전혀 없고 기름기도 많아서 쫀득하기 그지없다.


▲ 구룡포 발 과메기


그리고 대미를 장식한 우럭 미역국. 모 그룹 회장님이 며느리 출산을 위해 금일봉을 주고 우럭 미역국을 끓여갔다고 하는데 정말 기막히게 맛이다.


▲ 우럭 미역국


그리고 다음은 이날 우리와 함께한 와인들이다.


▲ 와인들


맨 왼쪽은 ㅈㄱ 님이 가져오신 호주 시라즈(Shiraz) 와인인데 달달하고 찐득한 시라즈의 맛이 아니라 약간 피노 누아(Pinot Noir) 스타일의 와인으로 이상하리만치 과메기와 잘 어울렸다. 왼쪽에서 두 번째는 샤또 딸보(Chateau Talbot), 세 번째는 와인업체 이사님이 송별회를 위해 도네이션 하신 독일 리슬링(Riesling) 와인, 네 번째는 ㅇㄱ 님이 가져오신 프랑스 론 지역 꽁드리외(Condrieu) 와인,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는 ㅈㅇㅇㅃ 님이 가져오신 스페인 리오하(Rioja) 와인사케, 일곱 번째는 내가 가져온 클라우디 베이 소비뇽 블랑(Cloudy Bay, Sauvignon Blanc), 맨 오른쪽에는 ㅂㅂ 님이 가져오신 본 로마네 와인(Vosne-Romanee Wine)인데 이날 과메기와 가장 잘 어울렸던 와인이었다. 피노 누아(Pinot Noir)나 숙성이 잘된 산지오베제(Sangiovese) 품종의 와인이 뜻밖에 과메기와 잘 어울린다.

첫사랑 딸보와는 아니 만났어야 했다. 피천득의 <인연>에서 백합처럼 시들어가는 아사코의 얼굴처럼 딸보도 그렇게 늙어있었고, 처음 만났을 때 느꼈었던 향기와 우아함은 온데간데없었다. 보관 조건이 너무 열악하여 한창 싱싱할 나이인데도 환갑이 지난 노파의 모습으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아사코와 세 번째 만남은 아니 만나야 좋았을 것이라고 후회했던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것 같았다. 와인도 그렇고 인연도 그렇다. 아무리 현재는 훌륭한 와인이거나 좋은 관계라고 할지라도 무관심하거나 보살핌이 없다면 시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모님이 제공한 맛있는 회와 그에 맞춰 각자 준비한 와인으로 함께한 송별회. 와인으로 만난 우리의 인연이, 잘 보관되어 묵힐수록 부드럽고 향기가 좋아지는 그랑크뤼 와인처럼 오래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