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
드라마보다 더욱 드라마틱한
현실의 생사고락에 대하여
우리나라에는 90년대부터 <종합병원>이라던가, <의가형제> 같은 의학드라마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대 들어 흉부외과 레지던트들을 그린 <외과의사 봉달희>라던가 일본 소설을 원작으로 권력지향형 주인공이 등장하는 <하얀 거탑>(2007)이 대히트를 쳤지요. 이후에 탄생의 과정을 다루는 <산부인과>, 신경외과를 소재로 한 <브레인>, 응급실의 인턴들이 주인공인 <골든 타임>이 이어졌어요. 2016년에 만들어진 <낭만닥터 김사부>는 작년에 시즌2를 방영하면서 인기를 증명했고요, 작년에 코로나19가 시작될 무렵 방영한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올해 시즌2가 기대되는 작품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리메이크되어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굿닥터>는 미국의 의학드라마입니다. 2020년 11월부터 시작된 미국의 <굿닥터> 시즌4는 코로나19에 대처하는 의료진들의 이야기, 변화하는 삶의 이야기가 담겨 눈길을 끕니다. 미국의 최장수 의학 드라마인 <그레이 아나토미>는 작년에 시즌16을 조기 종영하고, 드라마 촬영을 위해 소품으로 준비해 두었던 수술용 마스크라던가 장갑, 가운을 코로나 의료진에게 기부하기도 했지요. 그리고 새로운 시즌17에서 코로나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메디컬 드라마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병마와 싸우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살리려고 애쓰는 의료진들의 이야기는 생사를 걸고 싸운다는 점에서 어떤 전쟁소설이나 액션영화에 뒤지지 않을 만큼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세상의 어떤 가치보다도 더욱 소중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의료진들을 보면 존경스럽기도 하고, 감동스럽기도 합니다. 매일 눈을 뜨면 드라마 같은 현실을 만나는 의사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일단 내 앞에 놓인 생명을 살려내야 하는 사람들의 진짜 이야기를 만나봅니다.
응급실의 의사가 만난 삶과 죽음
「만약은 없다」
남궁인 지음, 문학동네
작가는 삶의 경험이 다양해야 한다고들 하지요. 인생의 깊이가 글의 깊이라는 말도 하고요.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남들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깊은 경험치를 갖고 계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의사의 글은 얼마나 깊고 뜨거울까요. 그는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의사이기도 하고,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의대 다니던 시절 레게머리를 하고, 국토대장정을 하고, 수십여 나라의 국경을 넘으며 여행했던 경험에다가 응급실에서 수없이 마주친 삶과 죽음의 경험을 더하면 누구보다도 인생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근에 쓰신 책도 있지만 필자는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남궁인 선생님의 첫 책이기도 하고, 삶과 죽음에 대한 조금 더 날카로운 고민이 느껴지기도 하거든요.
책에는 짐작하기도 어려운 희로애락과 실체를 알 수 없는 죽음이 실려 있습니다. 삶이 한 달밖에 남지 않은 환자가 응급실에 입원하러 오다가 교통사고를 내는 바람에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사람을 치어 죽이는 아이러니한 상황, 가까스로 살려낸 환자가 퇴원해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자살을 기도해 반나절 만에 시신으로 돌아오는 상황을 마주하게 됩니다.
의학드라마도 많고, 의료진들이 쓴 에세이도 많습니다만 이 책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가 마음을 쓰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응급실에는 생사의 기로에서 어쩔 수 없이 실려 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외래를 예약하고, 잘 차려입고, 제 발로 차를 타고 오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가장 위급하고, 고통스럽고,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그중에는 험한 일을 하다가 팔이 녹아버리고, 다리가 잘린 사람들, 외국인 노동자들, 노숙자도 있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나 마음을 씁니다. 공평하게, 최선을 다하기 위해 애씁니다.
환자의 아픔과 보호자들의 고통과 의료진들의 현실에 작가의 문학적 역량이 더해진 진솔한 글을 만납니다. 정답이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말고는 버틸 수 없는 시간을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요. 처절한 이야기에 아프다가도 맛깔난 글과 흐뭇한 상황에 웃음이 납니다. ‘만약은 없다’는 말, 순간에 최선을 다하기 위한 그의 결심이 의미심장합니다.
생의 남은 시간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김범석 지음, 흐름출판
의사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합니다. 어떤 환자가 오든 최선을 다해 살려내야 하지요. 그런 면에서 서울대 암병원 종양내과에서 일하는 김범석 선생님은 다른 의사와는 조금 다른 고민을 합니다. 그에게는 병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닐 때도 있거든요. 암 환자들에게는 보통 기대여명이라는 게 있고, 말기 암 환자들의 경우는 치료의 목적이 아니라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하는 목적의 항암치료를 받거나 최대한 죽음을 미루는 것이 목적이 되기도 합니다.
김범석 선생님이 만나는 환자들은 삶의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어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도 죽음을 예측할 수는 없지만 그는 의사로서 환자의 대략적인 기대수명을 계산하곤 합니다. 기대수명은 말 그대로 기대할 수 있는 남은 삶의 기간입니다. 변수가 있긴 하지만 환자의 상태에 근거해 남은 삶이 얼마나 될지 예측하는 일종의 평균값입니다. 수많은 환자들에게 기대여명을 전해주는 의사의 고충이 얼마나 클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말기 암 환자의 90%가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미국에서는 보통 사망하기 6개월 전까지 항암치료를 받는다고 합니다. 삶을 정리하는 데 적어도 6개월 정도의 시간을 가진다는 뜻이에요. 그에 비해 서울대병원의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죽기 한 달 전까지 항암치료를 받는다고 합니다. 삶을 정리하는 데 고작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주어질 뿐입니다. 길게는 6개월, 짧게는 한 달 동안 남은 삶에 대처하는 모습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못 했던 일을 해나가며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반면, 어떤 사람은 고집스럽게도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죽음 앞에서 자신을 찾아온 하나뿐인 혈육에게 ‘내 돈 갚으라’는 말을 남기는 사람도 있고, 자신이 암에 걸렸음을 가족에게 끝까지 알리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은 존엄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존엄한 삶이란, 존엄한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을 어떻게 하면 존엄하게 맞이할 수 있을까요. 그러려면 우리는 사는 동안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책을 읽으면서 고민을 거듭하게 됩니다. 결국 최선을 다해 남은 날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음을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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