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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요리와 친해지기

[와인과 친해지기] 와인 이야기, 남아공 와인 (KWV)

by 앰코인스토리 - 2017. 5. 31.

필자가 필리핀 파견 나와서 해보고 싶었던 일 중 하나는, 필리핀 사람들이 주최하는 전문적인 와인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멤버로 여러 와인 모임에 참석해서 다양하고 깊이 있는 와인의 세계를 맛보고 와인 친구를 여럿 만들어 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희망과는 달라서, 2년이 훌쩍 넘은 지금에도 이렇다 할 와인 친구도 없거니와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모임도 없다. 필리핀의 대표적인 와인유통 업체에 필자의 이메일을 등록해서 그들이 주최하는 디너 초대메일은 가끔 온다. 하지만 필자가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퇴근 후 가기에는 교통편도 시간도 맞지가 않기에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다만 집 앞에 단골 와인가게가 있어서 주말에 주로 아내와 들러 부담 없는 와인을 마셨다.



그렇게 2년 정도 다니다 보니 그 집 주인과 어느 정도 친해지고, 눈인사를 하는 사람들도 여러 명 생겼다. 그래서인지 그 와인샵에서 와인 모임이 있으면 가끔 필자를 초대하곤 했는데, 2주 전에는 반가운 문자가 왔다. 집 앞 와인가게 주인 로니에게서 온 문자인데, 남아프리카 와이너리에서 와인 홍보차 들렀다고 와인에 대한 설명과 함께 무료 와인 시음회를 한다는 것이었다. 월요일이라 부담이 되기는 했지만 놓칠 수 없는 기회여서 냉큼 신청을 했다. 가장 맛있는 와인은 공짜 와인이라는 말도 있듯, 공짜이기도 했지만 남아공 와이너리에서 직접 사람이 와서 와인을 설명하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여기서 잠깐 남아공 와인에 관해서 소개해 드리려 한다.


남아공(남아프리카 공화국) 와인은 아직 우리에게 생소하다. 아프리카의 끝에 위치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에는 백인이 유색인을 지배하는 인종분리정책의 어두운 그늘에 가려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 있었고, 와인산업 자체도 빛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인종차별이 철폐되고 최근 들어 고급 와인들이 수출되기 시작하면서 남아공와인의 품질과 가격경쟁력을 높이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남아공에서 생산되는 포도 품종 중에서는 피노타지(Pinotage)라는 적포도 품종의 와인이 유명하다. 이 포도는 1925년 남아프리카 KWV (Ko-Operative Wijnbouwers Vereniging Van Zuid-Afrika Beperkt : 남아프리카 와인 양조협동조합 연합회)에서 피노누아(Pinot Noir)와 생소(Cinsault)를 교배하여 만든 품종이다. 유럽에 있는 대부분의 포도나무는 남아공에서도 잘 자랐지만 유독 재배가 까다로운 피노누아는 잘 자라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덥고 건조한 지역에서도 잘 자라는 생소를 교배하여 피노타지라는 포도 품종을 만들어 내었다.

피노누아는 섬세하고 우아하고, 생소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그리하여 두 품종의 교배종인 피노타지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와인이 나올 거라 기대했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더 강한 맛과 다른 향을 가진 품종으로 태어났다고 하니, 이 또한 흥미로운 이야기다. 필자가 처음 만났던 피노타지와인은 너무 강하고 떫기까지 해서 쉽게 접하기 힘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드디어 와인모임이 있는 날이 다가왔다. 시간에 맞춰 장소에 도착했는데 이미 여러 사람이 와있었고 이름은 모르지만 여러 번 보았던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남아공에서 KWV(남아프리카 와인 양조 협동조합 연합회)와인에서 근무하는 Hugo가 준비한 11종류의 와인을 차례차례 마셔가며 와인 소개도 듣고, 또 궁금한 점에 대해서 답을 해줘서 정말 즐거운 자리였다.

처음에는 엔트리급 ‘클래식 콜렉션’ 와인들이 나왔는데, 그중에서 슈넹 블랑 품종으로 만든 화이트와인이 인상적이었다. 대중적인 포도 품종은 아니지만 소비뇽 블랑처럼 독특한 향으로 들이대지 않고, 샤도네이처럼 두루뭉술하지도 않은 어떤 독특한 개성이 느껴졌다.



다음으로 나온 와인은 CATHEDRAL CELLAR 시리즈로 중간급에 해당하는 와인이다. 샤도네이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고소한 느낌이 흡사 잘 만든 나파밸리 샤도네이와 비슷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이어서 나온 최상급 와인들은 MENTORS 시리즈로 하나의 밭에서 자란 포도나무에 극도의 가지치기를 통해서 열린 포도를 손으로 선별해서 만든 와인이라고 했다. 가격도 3만 원대 후반으로 부담 없이 즐기기에 적당한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제공된 디저트 와인과 드라이 진까지 총 11종류의 와인과 진을 한군데서 맛볼 수 있는 자리였다. 디저트와인은 아주 달달하면서도 농도가 짙게 느껴졌고, 드라이 진은 허브 향이 너무 강렬해서 마치 진한 약초로 담근 도수가 높은 술을 먹는 기분이었다.



남아공 와인모임에 참석했던 사람들 전체 모습이다. (오른쪽 테이블은 그냥 손님들)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이 남아공에서 날아온 Hugo,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이 랄프스 주인장 Ronnie다.



와인시음회에서 조금밖에 먹을 수 없었던 멘토스 피노타지 와인이 궁금해서 랄프스 와인 가게를 다시 찾았다. 한 병을 시켜 놓고서 시간을 두고 와인의 변화 과정을 보려고 했으나, 달콤한 향과 맛이 지배적이었을 뿐 시간이 지나도 와인의 변화를 느끼기 힘들었으며 와인의 가치를 높여주는 복합성은 좀 부족한듯 싶었다. 이상하다. 와인 시음회에서는 정말 괜찮은 와인처럼 느껴졌는데 왜 이번에는 그런 느낌이 없을까, 곰곰이 생각해봤더니 완전히 큰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공짜 와인과 내 돈을 주고 먹는 와인이었던 것이다.


조건 없이 만나는 공짜 와인은 기대치가 거의 없기에 부담 없이 다가오고 더 좋은 평가를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돈을 내고 먹는 와인은 가격만큼 값을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게 되고 실망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한 것 같다. 물론, 가격을 생각해보면 비슷한 가격의 칠레나 아르헨티나 와인에 비교해서 절대 뒤지거나 떨어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와인처럼 사람의 관계도 그러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람에게 기대가 없으면 작은 일도 고마워하게 되고, 설령 그 사람이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상처는 받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로 기대가 클 때는 실망도 크게 되고 그에 따른 상처도 내 몫으로 고스란히 남게 되는 것 같다. 공짜 와인을 접하는 것처럼, 주변 사람들을 별다른 기대없이 감사한 마음으로만 대한다면 스트레스도 적고 오히려 작은 것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WRITTEN BY 정형근

우연히 만난 프랑스 그랑크뤼 와인 한 잔으로 와인의 세계에 푹 빠져들었다. 주위에 와인 애호가가 늘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으로 사보에 글을 연재하게 되었으며, ‘와인에는 귀천이 없다.’라는 마음으로 와인을 신중히 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