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추위가 물러가고 봄 향기가 살살 풍겨오는 토요일 오후, 아들이 이사 간 아파트에서 집들이를 겸한 푸짐한 점심을 먹은 후 손자의 손을 잡고서 초등학교 정문을 들어섰다. 인터넷을 통해 학교 사진을 둘러보고 운동장 모습도 가늠했지만, 아파트 사이에 묻혀있는 1,000명가량의 건아를 품고 있다는 교정이 포근하게 다가왔다.
손자 뒤를 따라 1학년 교실을 창문 너머로 구경했다. 남아 18명과 여아 14명이 공부하는 곳에는 책걸상이 둥그렇게 배치되어 있었고, 입학식 때 아들이 보내준 동영상으로 눈에 익은 대형 걸개그림이 벽면 하나를 채우고 있었으며 그 위에 쓰인 ‘명문 ○○초등학교 입학을 축하합니다’라는 현수막도 그대로 있었다. ‘바늘구멍처럼 추첨되기 어렵다는 사립도 아니고, 시험 쳐서 입학한 곳도 아닌데 명문이라니.’ 순수하기만 한 동심에 어른들이 쓸데없는 경쟁을 부추기는 글귀 같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오전에는 아들이 손자를 데리고 동네슈퍼에 갔더니 계산대에 앉은 70대 할머니가 “처음 보는 얼굴이네. 애 잡으러 왔구먼. 이 동네가 바로 애 잡는 동네여.” 하더라는 말과 오버랩 되면서 한국 교육의 병폐를 보는 것 같아 걱정이 앞선다.
교실을 뒤로하고 인조잔디를 깔끔하게 입혀놓은 운동장을 쳐다보고 있자니 손자가 코앞으로 다가와서 “축구 하면 좋겠네.”한다. 작년부터 아파트에 사는 아저씨 한 분이 어린이들을 모아 토요일마다 축구교실을 열었다면서 우리 아파트에 와서도 긴 의자 밑의 공간을 골대로 여기고 여러 번 시합을 했지만, 이번에는 진짜 골대를 앞에 두고 번갈아가면서 공 넣기를 시도했다. 손자는 어설픈 동작으로 인사이드, 아웃사이드, 센터링이라고 종알거리면서 공을 차면 내 옆으로나 사타구니 사이로 빠져서 백발백중 골인이다. 내가 차는 공은 골대를 벗어나거나 손자 정면으로 향해서 허탕 치기 일쑤다. 그럴 적마다 손자의 솜사탕 같은 함박웃음이 내 가슴에 따뜻하게 안겨 온다. 무슨 시합이든 최종 승자는 언제나 손자다.
씨름을 붙으면 번쩍 들기도 하고 배치기를 해도 넘어지거나 땅에 닿지 않지만, 손자는 내 다리만 걸어도 힘없이 넘어지게 하는 천하장사다. 팔씨름하는 날이면, 바닥 가까이 쓰러졌다가도 오뚝이처럼 일어나서 힘을 주기만 하면 할아버지는 으~으~으~하면서 쓰러지기 마련이다. 윷놀이에서도 손자의 도는 모로 변하고 걸은 윷이 되지만, 나는 그 반대니 승부는 뻔하지 않은가? 딱지치기든 팽이놀이든 10대 5면 토라지고 10대 3 정도라야 만족하는 욕심꾸러기. 손자는 좋아서 깔깔거리고 나는 그게 보기 좋다고 실없이 허허~거린다. 보고만 있던 마누라가 그런다. “이젠 그만하지. 계속 지기만 하면 할아버지를 멍청이라고 생각할 걸!”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내 나이에 손자가 대학 2학년이었다. 그분은 손자가 고등학교 입학식 때 수석생의 자격으로 선서를 하러 교단에 올라가는 영광스런 모습도 지켜보셨고, 회계사에 합격한 기쁨도 같이했다. 합격 소식에 막차를 타고 인근 도시로 나와 선물로 금반지를 구매했다고 흥분에 들뜬 목소리를 전화선을 통해 들은 감흥이 지금도 생생하다.
손자는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며느리가 워킹맘인 데다 교육 변두리에서 중심지로 옮긴 것도 낯설고 힘든데, 안경까지 끼어 따돌림을 당할까 봐 노심초사다. 유치원 졸업 즈음해서 착용한 안경을 친구들이 놀린다면서 집에서만 썼다는데, 아들이 보낸 동영상에는 안경을 착용한 어린이가 일곱 명이나 되니 얼마나 다행인가. 며칠간은 등교를 힘들어하더니 친구도 여러 명 사귀고 예쁘장한 짝꿍을 만나고서부터는 한결 밝아졌다는 소식을 접하고, 무겁던 마음의 짐을 다소나마 내려놓는다.
글 / 사외독자 이성재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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