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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14

[글레노리 노란우체통] 혹스베리강 우편배달 혹스베리강 우편배달 - 나의 두려움은 압화되었다 브루클린에서 배를 타고 강 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보기로 했다. 7월은 시드니 겨울의 중심. 연일 우중이었지만 오래된 약속이었다. 홍수 끝에 척박한 황토색 강의 흐름을 따라 섬들은 강의 체수를 닮지 않고 초록빛을 울타리처럼 감고 있었다. 오랜만에 바싹 든 겨울 햇살에 섬들은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는 우편물을 배달하는 배의 여정에 동승했다. 옛 어른들이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 했다. 그 말도 세월 따라 탈색되는가. 나는 변하고도 아직 살아있다. 가파른 계단을 통해 이층 선상에 오를 때 미량의 멀미를 느꼈을 뿐 별다른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왁자지껄 흥겨워하는 일행 덕분일 수도 있겠지만 선상 서비스로 나오는 커피와 비스킷 맛을 온전히 다 느낄 정도니 이만.. 2022. 7. 14.
[에피소드] 참외 노란 참외가 풍년인 듯싶다. 시장 곳곳에 노오란 참외가 가득하다. 하지만 참외를 집어 들기가 겁이 난다. 얼마 전, 맛있는 참외라며 “꼭 사드세요!”라는 장사꾼 말만 철썩 같이 믿고 비싼 값을 지불한 참외가 무보다 못한 맛을 낸 적이 있었다. 참외를 잘 고르는 법까지 유튜브를 보며 공부를 했건만 처참한 실패를 맛보고 말았다. 언제부터인가 비슷한 크기와 잘생긴 모양 하며, 겉으로 봐선 참외의 속을 들여다보기란 점점 더 어려워졌다. 모양과 맛으로 참외의 진면목을 판별했던 때가 있었던 거 같은데, 지금은 과거의 잣대로 전락된 느낌이다. 참외의 맛으로 승부를 걸겠다고 하면서 무작위로 참외를 집어 들고 즉석에서 깎아 참외의 맛을 홍보하던 때가 문득 생각났다. 그러나 지금은 여기저기 둘러봐도 수북하게 쌓아 놓은 참.. 2022. 6. 15.
[글레노리 노란 우체통] 별들의 시간 두 시간째, 이불 속에서 도토리 알처럼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연거푸 하품이 터지고 있는데도 잠은 현관 밖으로 달아나버린 지 한참 전, 머릿속은 마당의 몇 줄기 찬 바람이 밀고 들어와 씻긴 듯 점점 명료해져만 갔다. 저녁 먹는 중에 틀어놓은 TV 정치토론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밥상에까지 건너온 토론 중의 몇 마디가 귀에 거슬려, 쓸데없이 사견을 붙이다가 급기야 방향이 다른 저 남자와 침 튀기는 말다툼으로 번지고 말았다. 거실에서 방으로 요리조리 어색한 분위기를 피해 다니다가 읽던 책을 덮고 머리맡 스탠드까지 끄고 일찌감치 자리에 누웠다. 돌아눕거나 부스럭대는 소리, 이어폰을 끼고 뭔가 들었다가 말았다가 끙끙거리는 소리, 서로 잠 못 들고 몸을 굴리다가 결국은 내가 못 견디고 일어나 버렸다. 속 좁은 모습들.. 2022. 5. 11.
[글레노리 노란 우체통] 사막의 지문 가을이 울룰루 빛처럼 도착했다. 그 오지의 햇살이 사막 한가운데 거대한 바위를 꿈꾸듯 물들이더니, 우리 집 배나무 끝으로 그 붉은 빛이 닿았다. 내륙의 붉은 사월의 바람도 3천 2백 킬로미터 떨어진 시드니에 닿는 것은 언제나 시간문제였다. 목이 칼칼한 혼미한 통증 속에 모래둔덕이 보이고, 그 너머에는 드넓은 사막이 펼쳐져 있다. 사막 중천에 낮달처럼 희미하게 휘청휘청 걸어가는 원주민들이 바위 사이로 보이는 듯했다. 길을 잃은 듯 걷는 이들의 뒷모습이 눈에 익기도 했다. 찢긴 모래바람에 지척을 가늠할 수 없는 가운데도 알 것 같은 건, 까슬까슬한 나의 이십 대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 저녁에는 여지없이 기침을 했다. 이십 대를 묻어버린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이 계절만 되면 찾아오는 인후통이.. 2022. 4. 13.
[글렌노리 노란 우체통] 오십 불로 물길이 잇다 신발을 찾았다. 구석에 던져 놓았던 운동화에는 묵은 거미줄과 먼지가 잔뜩 끼어 있었다. 벽에 대고 탁탁 터니 달걀 속껍질 같던 머릿속이 좀 개운해졌다. 지갑부터 챙겼다. 화원에 가려고 나서면 불현듯 잊고 있던 일이 떠오르곤 한다. 돈에 관한 실랑이라기보다는 맑은 물길을 따라 봄날 한가운데를 흘러가는 지폐 한 장과 그 결에 출렁이는 잊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길을 나선 팔월의 시드니는 겨울 막바지이며 봄의 초입이다. 꺾여 있던 마른 꽃대들이 스러져가고 마당은 남편 정수리처럼 빈자리가 숭숭 보인다. 장작불을 피어 놓고 집안에서만 두어 달 서로 치대다 보니 좀이 쑤시기도 했다. 화원에 좀 다녀오겠다고 했더니 같이 가자며 따라나선다. 이왕 나선 김에 블루마운틴 자락으로 멀리 나가보자 욕심을 낸.. 2022. 2. 16.
[에피소드] 옥 목걸이 세상을 살다 보면 특별한 체험을 할 때가 있다. 책 속에나 일어날 법한 일들을 경험하기도 하며 좋아하는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 나에게 일어나기도 한다. 그럴 때는 그냥 멍하다. 내가 나인지, 혹은 지금 나는 어디서 왔을까, 그것도 아니면 나는 참으로 위대한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착각과 망상을 한동안 쥐고 살게 된다. 그러나 그런 경험이 절대 나쁘지는 않다. 지루하고 따분했던 일상에 시원한 청량제가 되기 때문이다. 한때 홍콩 영화가 시대를 주름잡았을 때가 있었다. 이소룡, 성룡, 홍금보라는 배우가 인기 가도를 달라지면서, 나오는 영화마다 히트를 쳤다. 평범했던 주인공이 뛰어난 도사나 스승을 만나 무술의 달인이 되어 부모님의 원수를 갚거나 못된 놈들을 혼내 준다는 내용이 대다수였다. 그리고 뛰어난 스승은.. 2021. 3.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