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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엔지니어] 퍼시벌 로웰, 행성 X의 존재를 예측한 미스터 노월(魯越)

by 앰코인스토리 - 2015. 9. 1.


2015년 7월 14일, 무인 탐사선 ‘뉴 호라이즌스(New Horizons)’가 명왕성 근접 사진을 지구로 보내왔고, 그 이후부터 전 세계 온·오프라인에서 명왕성 사진이 새롭게 바뀌고 있습니다. 명왕성의 영어 이름은 ‘플루토(Pluto)’입니다.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저승의 신에서 따온 것이지요. 아르테미스, 아틀라스 등 다른 신들을 제치고 플루토가 된 것은 명왕성을 관측한 로웰 천문대의 설립자, 퍼시벌 로웰(Percival Lawrence Lowell, 1855-1916)이라는 사람의 머리글자가 플루토와 같은 Pl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퍼시벌 로웰은 조선을 여행하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이라는 책을 남기기도 한 작가이기도 해서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있는 천문학자인데요, 이번에는 명왕성의 파란만장한 이야기와 함께 퍼시벌 로웰의 인생에 대해서도 알아보려 합니다.


▲ 1904년 J.E. 퍼디가 보스턴에서 촬영한 로웰

사진출처 : https://goo.gl/utvGor


1930년부터 태양계의 아홉 번째 행성이었던 명왕성이 그로부터 76년이 지난 2006년 ‘왜소행성 134340’이라는 식별번호를 받고 그 지위를 상실했습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가 2006년 1월 무인 탐사선 뉴 호라이즌스를 발사할 때만 해도 명왕성이었던 별은 뉴 호라이즌스 호가 근접 촬영에 성공한 2015년 7월에는 134340이 되어있었습니다. 창공의 별은 변함없이 거기 빛나고 있건만 인간은 처음 발견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가 행성이랬다가 아니랬다가 변덕스럽기만 합니다. 명왕성의 이름이기도 한 플루토가 관장하는 저승에서 이 사태를 가장 슬퍼할 사람이 있다면 아마 퍼시벌 로웰일 것입니다.


퍼시벌 로웰은 해왕성 바깥에 태양계 제9의 행성 X가 있다고 믿고 예측한 인물입니다. 로웰 천문대를 세우고 별을 관측하던 그는 행성 X를 발견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사후에야 로웰 천문대의 연구원 클라이드 윌리엄 톰보(Clyde William Tombaugh)가 X-행성을 발견했고, 이 행성은 최초 예측자인 퍼시벌 로웰의 머리글자이기도 한 ‘명왕성’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미국 사교계의 명사, 조선을 유람하다


퍼시벌 로웰이 태어난 로웰 집안은 미국 보스턴의 부유하고 명성 있는 가문입니다. 퍼시벌의 남동생 애벗 로웰은 하버드대학교 총장을 지냈고, 여동생 에이미 로웰은 시인이자 비평가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1855년 세상에 나온 퍼시벌 로웰은 별 어려움 없이 자라 1876년에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보입니다. 상류 사회의 일원으로 여유 있게 생활하던 그에게 천문학은 일종의 취미였습니다.


이 부잣집 도련님은 호기심이 많았던지 지구 바깥뿐 아니라 지구 건너편 동아시아에까지 관심을 두었습니다. 1880년대 일본 유람을 떠난 퍼시벌 로웰은 1883년 5월, 주일 미국 공사의 주선으로 조미 수호통상사절단을 만납니다. 서기관 겸 고문이라는 직책을 부여받은 로웰의 안내로 조선인 사절단은 8월 일본을 떠나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게 됩니다. 3개월 동안 비서이자 통역관 미야오카 츠네지로와 함께 아홉 명의 조미 수호통상사절단을 수행한 로웰은 11월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옵니다.


▲ 보빙사 일행

사진출처 : https://goo.gl/5E11bd


여기서 잠깐, 우리나라 근대사로 빠져나가, 조미 수호통상사절단 ‘보빙사(報聘使)’에 대해 알아볼까요. 보빙사는 조선 최초로 서방에 파견된 사절단이라는 의의가 있습니다. 1882년 아직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기 전,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이라는 것이 체결됩니다. 이 조약에 따라 주한 미국 공사가 조선에 오게 되고요. 고종은 청나라 세력을 견제하려고 민영익(閔泳翊)을 위시한 보빙사 일행을 미국으로 보냅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을 거쳐 뉴욕까지 방문한 보빙사는 로웰의 고향인 휴스턴에도 방문했다고 합니다. 이때 보빙사 일행 중 한 명인 유길준은 미국에 남아 유학을 하게 됩니다. 이 보빙사 일행의 사진이 전해지는데, 사진 속 유일한 서양인이 퍼시벌 로웰입니다.


▲ 로웰이 촬영한 고종 (1884년)

사진출처 : https://goo.gl/6cNynz



▲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사진출처 : http://goo.gl/keihoj / http://goo.gl/SPhca6


조선에 돌아온 보빙사 일행 중 홍영식이 고종에게 로웰에 대해 알렸고, 고종은 국빈으로 로웰을 조선에 초대했습니다. 1883년 12월부터 3개월간 로웰은 한양에 머물렀습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퍼시벌 로웰에게는 노월(魯越)이라는 우리식 이름도 있습니다. 이때의 사진과 기록을 묶어 백과사전 형식으로 낸 책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입니다. 우리말로는 뒤늦게 번역되어 다른 이름으로 출판되었는데, 현재는 절판되었습니다. 로웰이 일본으로 돌아가고 나서 갑신정변이 일어났고, 로웰은 <조선의 쿠데타(A Korean Coup d'Etat)>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작성해 <애틀랜틱 먼슬리(Atlantic Monthly)>에 게재합니다. 조선보다는 일본에 오래 머물렀기에 일본인에 관한 책을 더 많이 남겼고, 이쪽이 더 유명합니다.


화성에서 명왕성까지 뻗어 가는 탐구열


조선과 일본이라는 나라를 미국에 소개한 여행작가로 남을 뻔한 퍼시벌 로웰은 우주 쪽으로 인생의 방향을 선회합니다. 1894년 카미유 플라마리옹이 쓴 「행성 화성(La planète Mars)」이라는 책을 읽고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당시에는 화성에 물이 흐른 흔적이 있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지적인 생명체가 화성에 거주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고요. 로웰도 여기에 현혹된 것 같습니다.


▲ 자신의 천문대에 있는 로웰의 모습

사진출처 : http://goo.gl/axgbS1


로웰은 부유한 집안 출신이라는 자신의 조건을 십분 활용합니다. 애리조나 주 플래그스태프라는 곳에 로웰 천문대를 지은 것이지요. 플래그스태프는 2,000m의 높은 고도에 연중 구름 낀 날이 많지 않은 천혜의 천문대 자리였습니다. 아예 거주지를 옮긴 로웰은 15년 동안 화성을 관찰하고 기록합니다. 이것을 「화성」, 「화성과 수로」, 「태양계」, 「세계의 진화」 등의 책으로 펴냅니다. 화성의 물과 화성인은 로웰의 오해와 착각에서 촉발된 허구였지만 우주에 대한 당대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화성 관측에 상당 기간 세월을 바쳤지만, 퍼시벌 로웰이 과학적 업적을 남긴 분야는 명왕성에 관한 것입니다. 아직 해왕성이 태양계의 끝이라고 믿던 시절, 제9의 ‘X-행성(Planet X)’이 있다는 것이 로웰의 주장이었지요. 근거 없는 믿음이 아니라 천왕성과 해왕성의 예측 위치와 실제 위치의 차이를 이용해 추정한 위치를 끈질기게 더듬었습니다. 천왕성과 해왕성의 질량 정보가 부정확했기에 끝내 발견하지는 못했지만요. 로웰은 1916년 11월 12일 숨을 거두고 천문대 근처 언덕에 별을 바라볼 수 있도록 묻혔습니다.


시적인 명왕성의 운명


▲ NASA가 2015년 7월 14일 인스타그램에서 공개한 명왕성 실제 사진

사진출처 : https://goo.gl/UKRitF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지구와 우주를 주유하다 떠난 퍼시벌 로웰과 달리, 명왕성의 운명은 어딘가 비극적인 시와도 같은 측면이 있습니다. 태양계에서 가장 멀리 있다는 점 때문에 발견될 때부터 명왕성에는 어둡고 차가운 이미지가 달라붙었지요. 명왕성의 궤도가 타원형이어서 1979년부터 1999년까지는 해왕성 궤도 안쪽으로 들어왔었는데요. 그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명왕성은 1930년~1979년, 1999년~2006년에만 태양계에서 가장 먼 행성이었습니다.


태양계 행성의 정의는 계속 변해왔습니다. 현재 행성의 조건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일정한 질량과 구에 가까운 형태를 가졌으며, 궤도 주변의 다른 천체에 지배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명왕성은 질량이 작기도 하거니와 위성인 줄 알았던 ‘카론(Charon)’에 휘둘리기도 해서 행성의 지위를 잃어버렸습니다.


어둡고 차가운 명왕성은 이제 버려진 별이라는 이미지까지 얻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애틋함이 생겨나서인지 명왕성, 왜소행성 134340의 팬은 더 늘어난 것 같습니다. 김소연 시인이 쓴 <명왕성에서>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시인 본인이 시작 노트에서 “명왕성에 대해 내가 아는 건 태양계에서 제외된 별이라는 것과 태양으로부터 아주 먼 별이라는 것뿐”이라고 밝혔습니다.


▲ 자신의 천문대에 있는 로웰의 모습

사진출처 : https://goo.gl/81mKNO


잘 있다는 안부는 춥지 않다는 인사야. 고드름 종유석처럼 플라스틱처럼. (너는 전기난로를 장만하라 말할 테지만.) 덕분에 나는 잘 있어. 이곳은 뺄셈이 발달한 나라. 한낮에도 별 떴던 자리가 보여. 사람이 앉았다 떠난 방석처럼 빛을 이겨 낸 더 밝은 빛처럼 허옇게 뚫린 자리가 보여. 그때는 별의 모서리를 함부로 지나던 새의 날갯죽지가 베이지. 하루하루 그걸 바라보고 있어.

말해 줄게. 나의 진짜 안부를. 네가 준 온도계는 미안하게도 쓸모가 없었다는 것도. 네가 준 야광별자리판은 쓸모를 다한다는 것도, 밤낮 칠흑이라 밤낮 빛을 낸다는 것도. (너는 다행이라고 말할 테지만.) 새들은 고드름 종유석 구멍에다 둥지를 틀지. 강아지는 플라스틱으로 배를 채우지. 나는 날마다 뺄셈을 배우지. 나는 점으로 접혔다가 한낮에만 잠시 부풀어 오르는 작은 구슬이 되었어. 생각지 못했던 사물들과 하루하루 친밀해지는 시간들이야.


명왕성 촬영을 마친 뉴 호라이즌스 호는 태양계 외곽을 탐사하기 위한 여행을 계속하고 있을 것입니다. 시스템 엔지니어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이 프로젝트에 가담했고, 함께 가슴을 쓸어내리는 순간도 많았지요. 100년 전 한 사람이 지녔던 여유가 인류를 여기까지 이끌어왔습니다. 명왕성이 왜소행성이 되는 과정은 실패나 추락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더 다양한 지식과 상상력을 얻게 된 비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혀 쓸모 없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여유만이 우리 인류를 발전시켜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우리 각자의 X-행성은 어디서 나타날까요.



글쓴이 김희연은_사보와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자유기고가다. 자기 과시에 지나지 않는 착한 글이나 빤한 이야기를 피하려고 노력하며 쓰고 있다. 경력에 비해 부족한 솜씨가 부끄럽고, 읽어주는 독자에게는 감사하며 산다.


※ 외부필자에 의해 작성된 기고문의 내용은 앰코인스토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