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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요리와 친해지기

[와인과 친해지기] 필리핀 득템와인 1편, 울프 블라스 그레이 라벨

by 앰코인스토리 - 2015. 8. 28.

필리핀 마닐라 주변 소도시에서 생활하다 보니, 와인 가게가 몇 개 되지 않고 규모도 작은 관계로 괜찮은 와인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한국처럼 여러 수입회사에서 와인을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 와인업체에서 와인을 공급하기에 와인 리스트 또한 단조롭기 그지없다. 하지만 나름 ‘매의 눈’으로 매장 구석구석을 돌다 보면 (한국에서는 고가에 팔리는데) 필리핀에서는 정말 믿어지지 않는 착한 가격에 팔리는 와인들이 드물게 눈에 띈다. 그때의 기쁨이란 심마니가 산삼 정도는 아니고 자연산 큰 더덕이나 귀한 버섯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과 견줄 수 있을 것 같다. 필자에게 큰 기쁨을 준 와인 중 하나가 울프 블라스 그레이 라벨 시라즈(Wolf Blass Grey Label Shiraz)이다.


▲ 울프 블라스 로고

이미지출처 : wolfblass.com


▲ Wolf Blass

이미지출처 : wolfblass.com


잠깐 울프 블라스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이렇다.

울프 블라스(Wolf Blass)는 창업자 이름인 Wolfgang Franz Otto Blass에서 따온 것이다. 울프 블라스는 1934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울프가 학교에서 도망치자, 그의 부모님은 3년 와인제조 견습생을 할 것인지 학교로 다시 돌아갈 것인지 둘 중 하나를 택하게 했다. 그는 와인의 길을 택했고, 이때부터 와인세계를 바꿔놓을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1957년, 프랑스에서 샴페인 테크닉을 공부한 울프는 Wine Science 분야에 마스터 자격증을 가지고 졸업한 최연소자로 기록되었다. 1959년 그는 영국에서 art of blending을 공부하였으며 1961년에 호주 바로사 밸리(Barossa Valley, 호주 최고의 와인 산지)에 정착한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후인 1966년에 그는 Wolf Blass Wine을 설립한다. 그동안 갈고 닦았던 실력으로 1967년 그레이라벨을, 1973년에 블랙라벨을 탄생시켰는데, 그 이듬해인 1974년 Jimmy Watson Trophy(호주 최고의 와인 상)를 수상하는 놀라운 성과를 얻게 되었다.


그즈음 매입한 호주의 땅 빌야라 로드(Bilyara Road)라는 이름 중 빌야라의 뜻이 호주 원주민어로 ‘수리매(eaglehawk)인 것에 착안하여 와이너리의 심볼로 사용하게 된다. 이후 울프는 사람들이 매일 편히 마실 수 있는 대중적인 옐로우 라벨의 생산으로 다시 한 번 히트를 해서 성공의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꾸준한 품질 혁신과 마케팅 성공에 힘입어 현재까지 8,500개 이상의 트로피를 획득한 호주 제2의 와이너리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전 세계에서 1초에 10병씩 팔린다고 하니 그 규모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참고로, 울프 블라는 색깔이 각기 다른 와인 라벨을 사용해 와인 제품군을 구별한다. 엔트리 레벨인 레드 라벨부터, 옐로우, 골드, 화이트, 그레이, 블랙, 그리고 최상위 레벨인 플래티늄 라벨까지 있다. 쉽게, 가격순이라고 보면 된다.  옐로우 라벨은 울프 블라스 초창기 시절 모든 해외 와인이 흰색 라벨을 사용했기에 가장 눈에 띄기 쉬운 노란색 라벨을 사용하여 울프 블라스 와인을 쉽게 찾을 수 있게 고안되었다고 한다. 그 후로 더 많은 색상의 라벨들이 출시되었는데, 레드 라벨은 홍콩 와인시장에 진출할 때 소개되었고, 골드 라벨은 오스트랄리아 국기를 단 Qantas항공의 퍼스트 클래스 승객을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미지출처 : wolfblass.com


약 8년 전, 괌으로 떠난 가족여행에서 간식거리를 사러 갔던 호텔 앞 슈퍼에서도 와인을 팔고 있었다. 당시에는 와인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았던 초보 시절이었기에 와인을 고르기란 정말 쉽지 않았다. 대부분 처음 보는 와인들 속에서 날개를 활짝 핀 수리매 로고에 노란색 레이블 위에 선명하게 나타난 포도 품종. 게다가 특이하게도 스크류캡 마개를 한 와인이 눈에 띄었다. 그 와인이 바로 울프 블라스 옐로우 라벨 카베르네 소비뇽이었다. 오프너가 따로 없었던 필자에게는 딱 다가오는 와인이었고, 미디움 바디 와인으로 맛과 향이 신선해 부담 없이 음미했던 와인이었다. 이후로 몇 년 동안 울프 블라스를 만날 기회는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에 해외출장을 다녀오시던 팀장님께서 팀원들 회식할 때 내놓으려고 와인 한 병을 사오셨는데, 울프 블라스 골드 라벨 시라즈였다. 한정식 식당에서 10명 가까운 인원이 맥주잔에 따라 마셨는데도 그 향과 맛이 대단했고, 마시는 사람마다 정말 맛있는 와인이라고 입을 모았다. 괌에서 만났던 옐로우 라벨보다는 훨씬 고급스럽다는 느낌을 받았고, 울프 블라스를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난주 울프 블라스 그레이 라벨 시라즈를 만났다. 장을 보러 거의 주말마다 들르는 큰 마트에 딸려있는 작은 와인 코너인데, 무심코 둘러보다가 울프 블라스 와인이 모여있는 곳을 발견했다. 옐로우, 레드, 골드 등이 있었는데, 그 위 칸에 그레이 라벨 여섯 병이 나란히 누워있었다. 이런 곳에 그레이 라벨이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맥라렌 베일(호주의 유명 와인 산지)에서 선택적으로 수확한 포도로 만든 울프 블라스의 프리미엄 와인인데, 필리핀에서 판매되는 가격은, 단돈 35,500원! 한국에서 팔리는 레드 라벨 권장 소비자가보다도 한참 아래에 팔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격이 믿어지지 않아 계산대로 나올 때까지 의심했지만 역시 그 가격이 맞았다. 들뜬 마음으로 서둘러 집에 돌아와 성급하게 스크류캡을 열고 잔에 따라 맛과 향을 보았는데 정말 훌륭했다. 과일잼 폭탄 같이 찐득한 스타일과는 전혀 다르게, 맑고 은은하게 다가오는 블랙베리와 다크초컬릿 향이 코를 즐겁게 해주었고, 섬세한 타닌과 조화로운 산도에 의한 긴 피니쉬가 또 다른 시라즈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필리핀 사람들이 득템와인을 알아채기 전에 빨리 가서 두어 병 더 구매하고 귀한 손님이 집에 왔을 때 함께 나누고 싶었다.


지금 팔십이 넘은 나이에도 아직도 승마와 와인을 좋아한다는 울프 블라스. 58년 전 그가 섰던 선택의 갈림길에서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공부하는 길을 선택했다면, 아마 와인 애호가들은 이렇게 뛰어난 와인을 만나지 못해 많이 아쉬웠을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블랙 라벨과 플레티늄 와인도 만나보고 울프 할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호주 울브 블라스 와이너리도 둘러보고 싶다. 물론 꿈 같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상상은 자유이니 말이다.


©정형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