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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일상다반사

[에피소드] 지렁이잖아!

by 앰코인스토리 - 2015. 8. 24.


과년한 딸이 결혼하면 근심·걱정이 끝나는 줄 알았는데 그건 일시적인 착각이었다. 그래도 밝은 면이 더 많아졌으니 축복받은 일 아닌가. 나와 아내의 생일이 2주 간격이라 아들네가 외식에다 선물까지 챙겼는데, 올해부터는 내 생일은 아들네가, 아내는 딸네가 챙겨주는 방식으로 바뀌어서 즐거운 날이 배가 되었다. 지난 토요일이 딸네가 집으로 초대한 날이었다. 하루 전에 사위까지 반차를 내서 음식물을 장만했다고 하여 기대가 컸는데, 마침 주말농장을 가꾸어 놓았다고 해서 먼저 둘러보기로 했다.


자동차로 나무와 숲으로 둘러싸인 공원 같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서울의 한복판에 이렇게 넓은 공간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주차장을 벗어나 농장으로 가고 있자니 아들 가족이 정문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우리를 발견한 손자가 “할머니!” 하며 달려와서는 양팔을 벌리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아내와 나를 한꺼번에 감싸 안는다. 약간 경사진 언덕의 오른쪽으로 300평이 넘을 것 같은 농장이 네 곳이나 되었다. 사위와 딸의 농장 덕에 우리도 상추와 고추, 토마토까지 사 먹지 않게 되었다.


빨갛게 익어가고 있는 방울토마토를 발견한 순간부터 손자, 손녀는 물 만난 고기다. 허겁지겁 달려간 손자는 양손 가득 고추를 움켜쥐었고 토마토가 만만한 손녀의 양손이 바쁘게 움직인다. 팻말로 구분해놓은 여러 구역에는 고추, 상추, 토마토, 오이, 가지, 옥수수, 호박이 싱싱한 모습을 드러냈고, 땅콩, 고구마, 감자는 넝쿨이 무성하게 뻗어 있었다. 아내와 아들은 딸네가 땀 흘려 물주고 가꾼 작물들이 맺은 열매가 신기하고 감격스러운지 스마트폰에 담느라 분주하다. 며느리가 “땅콩의 열매가 어디 있는지 안 보이네.”하기에 “땅콩은 말 그대로 땅속에 열매가 달리는 콩이야.”라고 알려주며 웃었지만, 시골에서 나고 자란 구세대와 서울에서만 살아온 세대와의 차이를 실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농장마다 한쪽에는 아담한 정자가 있고, 그 옆에서 바비큐를 즐긴 흔적이 보여 아들네와 딸네는 자연스럽게 다음에는 우리도 바비큐를 하자는 약속으로 이어진다. 아내는 잡초들을 헤쳐 가며 쇠비름을 채취하는 데 여념이 없다. 봉지마다 고추와 가지, 토마토와 오이를 가득 담고 난 손자가 물 호스를 발견하고는 신이 났다. 우리 집에 와서도 화분에 물주고 빈 통에 채우는 것을 빠뜨린 적이 없는 손자다. 아비에게 물을 틀라고 하고는 호스를 고추밭으로 향했는데, 셈이 많은 손녀가 같이 잡겠다고 달려드는 바람에 오이 따던 사위가 물벼락을 맞았다. “승하야, 고모부 옷이 다 젖었잖아.”라고 고모가 나무라는 데도, 물 뿌리는 재미에 흠뻑 빠진 손자는 돌아보지도 않고 “물이 더위 먹었나 봐.”라고 해서 가족 모두가 웃음보를 터트렸다. 


아파트에 도착해서, 케이크를 앞에 놓고 축하노래를 부르는 손자, 손녀의 모습이 너무나 진지해서 놓치기 아까웠다. 반찬 중에는 언제 삶아 무쳤는지 내 앞으로 쇠비름이 놓여있었다. 요즘처럼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면 고추장으로 버무린 쇠비름에다 찬밥을 넣고 비볐던 추억이 남달라서 매년 한두 번씩은 먹게 되는 별식이다. 손자에게 “이게 몸에 좋은 음식인데 먹어볼래?” 했더니 젓가락으로 이리저리 뒤지더니 벌겋고 긴 줄기를 발견하고는 “이거 지렁이잖아.”라며 기겁을 한다. 잎은 작으면서 줄기가 길고 억세서 경상도에서도 일부 지역에서만 먹는 것으로 알고 있다. 못살던 그때의 입맛을 손자가 좋아하리라고 생각하다니, 얼마나 얼빠진 할아버지인가?


글 / 사외독자 이종철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