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수 1620만, 매출액 1500억 원, 한국영화 역대 박스 오피스 2위! 올 상반기 대한민국 영화관에 몰아쳤던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이하 왕사남)의 압도적 흥행은 가히 충격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그야 말로 누구도 예상치 못한 대박 사건임이 틀림없습니다.
사실, 흥행보증수표인 감독도 아니고, 스토리도 이미 결론이 정해져 있는 사극인데다, 거기에 영화를 두 시간 동안 끌고 나갈 서사는 고작 실록에 몇 줄 되지도 않는 사건이었지만, 이 모든 악조건을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전 국민을 영화관으로 모이게 하고 눈물샘을 자극하게 하여 K-컬쳐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증명한 시대의 명작임이 분명합니다.
왕사남의 배경인 된 장소는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일대입니다. 4월 산사랑의 정기 트레킹은 모처럼 의미가 있는 장소를 한번 걷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최근 국내 여행지 중 가장 핫한 장소인 영월로 결정하고 단종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의미 깊은 트레킹을 준비했습니다.
현재 영월은 영화 <왕사남>의 폭발적 인기로 ‘단종 앓이’ 중입니다. 이미 청령포의 방문객 수가 지난해 방문한 방문객을 훌쩍 넘어섰고, 단종대왕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장릉, 선돌 등의 유명 유적지는 방문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영화의 메가히트가 지역 경제를 들썩이게 하여, 오랜만에 강원도 작은 도시에 생기가 넘치고 있습니다. 때마침 시기는 벚꽃이 절정을 이루는 타이밍이라, 오늘 여정은 눈 호강하기에 최고의 조건을 갖춘 셈이지요.










우리가 청령포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9시 30분. 이미 SNS를 통해 들은 바 대로, 주말 청령포에 입장하려면 오픈런이 아닌 이상 두세 시간 대기는 기본이라는 어마무시한 소문에 솔직히 트레킹을 기획한 사람으로서 조마조마했답니다. 다행히 우리가 도착했을 땐 예상보다 길지 않던 대기줄 덕분에 40분 만에 청령포에 입장할 수 있는 배를 탈 수 있었습니다. 가장 피크 시즌에 대기 40분이면 정말 엄청난 선방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청령포 단종 유배지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그야말로 요새 같은 곳입니다. 뒤쪽은 험한 원시림이라 배를 타야만 육지로 나올 수 있는, 유배지로서는 정말 최적의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를 타는 선착장에서 청령포를 바라보면 정말 아름답고 그림 같은 풍경이 보입니다. 동양화에서나 볼 수 있는 한 폭의 그림 같은 명소인데, 그 어떤 역사보다 더 큰 슬픔이 남아 있는 곳이라는 것이 마음을 짠하게 만듭니다. 배를 타고 1분이면 바로 청령포에 도달합니다.
청령포는 수백 년이 넘은 노송들 속에 단종이 유배생활을 했던 어소가 자리하고 있는데요, 이곳이 유배지가 아니라면 휴양 장소로서는 최고의 자연 환경을 자랑하는 장소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어소 주변엔 마침 진달래가 만개해 어두운 분위기의 청령포를 밝게 비칩니다. 청령포 곳곳에 단종의 유배 생활의 흔적들이 남아있습니다.
망향탑, 관음송과 같은 흔적은 한양에 두고 온 정순왕후를 그리워하는 어린 단종의 애달픔의 표식이기도 하지요. 세상과 단절된 오지 중에 오지인 이곳에서 유배를 당하고 시신조차 버려질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왕. 그리고 목숨을 걸고 시신을 수습한 영월호장 엄흥도의 이야기가 이제는 더 이상 단종의 넋을 외롭지 않게 전 국민을 이곳 청령포와 영월로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청령포를 나와 본격적으로 트레킹을 시작합니다. 청령포는 국내 최고의 고원 트레킹 코스인 운탄고도 1330의 시작점입니다. 탐방안내센터도 있고, 여기서부터 삼척까지 173km의 탄광 산업의 흔적을 걸을 수 있는 멋진 둘레길이 이어집니다. 그렇게 나지막한 산을 올라 정겨운 시골길을 걷다 보면 절로 기분이 좋아집니다. 도심의 분주함을 잠시 잊으며 여유를 가지고 걸을 수 있는 시골길 옆으로 태백선 철길이 나란히 놓입니다.
강원도의 봄은 이제 시작한 듯합니다. 햇살이 막 피어난 4월의 시골길. 철길 옆으로 노란 개나리가 바람결에 살짝 흔들리며 봄의 인사를 건넵니다. 마치 스펀지 위를 걷는 것 같은 부드러운 흙길은 겨우내 묻어 두었던 숨결을 풀어내듯 포근한 향기를 피워 올리고, 발걸음마다 작은 생명들이 바스락거리며 봄의 리듬을 만들어 냅니다. 뺨을 스치는 봄 바람에 살짝 흘린 땀방울이 마를 무렵, 멀리서 들려오는 기차의 희미한 울림조차 이 고요한 풍경 속에서는 하나의 느린 시처럼 번져갑니다.
마음이 편해지는 시골길이 끝나는 지점에는 영월 현지인들만 아는 영월 최고의 벚꽃 성지가 시작됩니다. 영월읍 사람들에겐 하송리 벚꽃길로 유명한 길인데요, 외지인들에겐 거의 알려지지가 않아 한적하게 벚꽃 구경을 하며 벚꽃의 정취를 즐길 수 있는 명소입니다. 세경대 앞을 지나 영월 스포츠 파크로 이어지는 벚꽃길은, 스포츠 파크 안으로 들어서면서 더 화려하고 큰 규모에 감탄사가 터집니다. 이곳에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스포츠 시설이 있다는 것에도 놀라고, 그 주변을 둘러싼 가로수가 전부 벚나무라 가족 단위로 벚꽃 구경을 즐기기에 너무나 좋은 곳입니다.
때마침 오늘이 영월 벚꽃축제라 여러 가지 이벤트가 준비 중이고, 각종 푸드트럭이 즐비하여 맛난 간식을 여기서 즐겼습니다. 산사랑 트레킹 역사상 처음으로 현지 조달 간식도 즐기고 소풍 온 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하송리 벚꽃길은 현지인들만 아는 벚꽃길이다 보니 정말 사람이 없습니다. 너무나 여유 있게 흩날리는 꽃비를 맞으며 감성에 젖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스포츠 파크를 나와 동강 강변을 걷는 기분이 아주 상쾌합니다. 어제 꽤 많은 비가 내려서 그런지 오늘의 대기질이 아주 깨끗하고, 모처럼 미세먼지 없는 맑은 하늘이 트레킹을 하기엔 최적의 날씨인 것 같습니다. 영월은 두 개의 강이 존재합니다. 평창과 횡성 쪽에서 흘러오는 서강, 정선 쪽에서 흘러오는 동강인데요, 이 두 강이 만나 영월읍에서 남한강이 되어 단양, 충주, 여주를 거쳐 팔당으로 흘러갑니다.
<왕사남>을 보면 엄흥도가 동강에서 이른 새벽에 다슬기를 잡았다고 하는데, 바로 사진 속 다리 부근에서 잡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동강 강변에도 벚꽃이 아주 예쁘게 개화했습니다. 정말 4월은 대한민국 어딜 가나 벚꽃에 취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동강 강변을 따라 계속 걷다 보면 박중훈, 안성기 주연의 영화 <라디오 스타>를 촬영했던 라디오 스타 박물관이 나옵니다. 영월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된 영화였지요. 라디오 스타 박물관에서 좀 더 걸으면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민충사에 이릅니다. 사실 <왕사남> 이전에 민충사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보통 라디오 스타 박물관까지만 구경 왔다가 그냥 돌아가는데, <왕사남>이 대박 터지면서 단종의 흔적을 찾아 민충사를 찾는 이가 폭발적으로 늘었다고 합니다. 민충사는 영화의 엔딩쯤에 나오는 단종을 모시던 시녀가 단종의 죽음을 슬퍼하며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 바로 위에 지어진 사당입니다.
어린 단종과 끝까지 함께 하며 목숨을 버린 그녀들의 죽음과 넋을 기리며 만든 사당인 것인데, 사육신 생육신과 더불어 단종의 충신 중에 충신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녀들이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은 얼마전 매스컴에도 크게 이슈가 됐지만, 봉래산 모노레일 설치 공사를 하면서 크게 훼손되었다고 합니다. 생각 없는 개발 논리에 안타까움이 그만 밀려옵니다.
라디오 스타 박물관에서 민충사까지 이어지는 공원은 규모도 꽤 크고 정말 아름답습니다. 주변 경관도 멋지고 역사적 의미도 있고, 영월을 찾는 여행객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은 장소가 분명합니다. 모든 여정을 마치고 늦은 점심을 먹었습니다. 영월에서 한식을 먹으면 대부분 밑반찬으로 나물 종류가 많이 나옵니다.
식사를 다하고 귀가하는 길. 영월 10경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선돌에 들렸습니다. 주차장에서 1분이면 갈 수 있는데요, 그 풍경은 정말 중국의 장가계나 동해의 두타산을 보는 듯한 절경 중 절경입니다. 어떻게 바위 두 개를 저렇게 쪼개어 놓았는지, 그 사이로 보이는 서강의 모습은 가히 영월 제1의 풍경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단종이 청령포로 유배를 가던 중 그 절경을 보고 우뚝 서 있는 바위의 모습이 마치 신선처럼 보였다고 하여 선돌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하네요.
청령포에서 선돌까지 온종일 단종의 흔적이 남아 있는 명소를 걸었던 의미있는 트레킹이었습니다. 단순히 자연만 즐기는 모임이 아닌, 때론 역사의 현장을 찾아 그 의미를 생각해보고 과거의 숨결을 느끼며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 걸어보는 것도 산사랑 동호회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영화에서 느낀 감동을 생생하게 현장을 찾아 함께 즐겼던 왕사남 트레킹! 또 하나의 추억의 파일로 저장될 것입니다.
글과 사진 / 기술연구소 선행기술개발그룹 김용준 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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