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이 뚜렷한 대한민국이 내 조국이라는 것은 큰 축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애국심이 대단한 국민은 아니지만, 자연을 좋아하고 아웃도어 활동에 진심인 필자는 사계절마다 바뀌는 강산의 풍경에 그저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한 계절의 풍경이 1년 내내 지속된다면 좀 지루하고 계절의 변화나 세월의 흐름에 둔감할 수밖에 없을 텐데, 우리의 일상이 권태기에 빠질 때쯤 계절의 변화는 다시금 우리의 삶에 활력을 줍니다. 2026년 새해 첫 달 겨울의 한복판에서 아웃도어 동호회 산사랑에서는 한국의 겨울 산행지 중 최고로 인기가 많은 강원도 평창 선자령에 다녀왔습니다.
겨울은 겨울다워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드는 요즘입니다. 날씨도 예전만큼 춥지 않고 겨울의 상징인 눈은 스키장에서나 볼 수 있을 만큼 겨울 가뭄이 심해서, 전국의 고원 지대에도 눈이 없다고 합니다. 지리적 특성상 눈 구경을 할 수 있는 확률이 가장 높은 곳은 선자령이기에, 신년 첫 산행지를 선자령으로 정해놓고 이후 날씨는 하늘에 맡겼습니다.
최근 날씨가 곡선을 그리며 춤을 추고 있습니다. 산행 전날까지 꽤 추운 영하의 날씨를 보였고, 산행 당일은 영상의 날씨 속에 중부 지방은 겨울비가 내렸습니다. 산행 다음 날은 또 다시 강추위로 전국이 꽁꽁 얼어붙었고요. 좀체 적응하기 힘든 한국의 겨울 날씨! 그래서 이번 산행에 참가한 모든 분이 정말 대단하고 아웃도어 활동에 진심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자령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를 하자면, 여러 가지 수식어가 붙는 트레킹 및 산행의 성지입니다. 1157m의 정상석 주변은 광활한 수백만 평의 대관령 초원이 펼쳐져 있어서 이국적 풍경을 만들어 냅니다. 사계절 언제 와도 가려지는 장애물이 없어, 정말 뻥 뚫린 시야는 안구 정화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듯할 정도랍니다. 능선이 시작되는 지점부터는 나무가 거의 없는 초원과 풍력 단지가 이어집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바람의 고장답게 바람이 정말 엄청납니다. 그래서 이곳에 수십 개의 달하는 속칭 대왕 바람개비인 풍력 발전기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지요.
산행 당일, 인천 지역의 새벽 기온은 영상 6도. 이미 비가 내려서 땅이 촉촉히 젖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목적지인 대관령 지역은 대설주의보와 강풍주의보가 동시에 내려졌습니다. 기온은 온종일 영하 5도 이하의 추위가 이어질 거라는 예보도 있습니다. 산행 전날 참가하는 회원들에게 혹한에 대비하여 철저하게 방한 준비를 하라고 연락을 했습니다.
당일, 출발 전에 대관령 지역 및 선자령 주변 CCTV를 보니 눈이 많이 쌓여 있고 계속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눈 구경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은 들떠 있는데, 한편으로는 폭설로 인해 버스가 진입조차 못 하는 건 아닌지 내심 걱정도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춥고 가장 눈이 많이 오는 곳이라 폭설이 내린다면 도시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곳입니다. 설레는 마음을 품고 드디어 출발합니다. 현지 악천후에 대비해 스노우 타이어가 장착된 버스와 베테랑 기사님으로 교체한 건 신의 한 수였습니다.
버스가 원주를 지나 횡성에 들어서면서부터 눈발이 날리기 시작합니다. 대한민국이 좁다고 하지만 신기하게도 영동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필자만 알고 있는 기후 변경선이 존재합니다. 새말IC를 지나 코레스코 콘도부터 횡성 휴게소까지 계속 오르막 구간이 이어집니다. 이후 횡성 휴게소부터 뭔가 달라진 공기가 느껴집니다. 해발고도가 순식간에 300m 정도 높아진 것이지요. 필자는 여기를 기후 변경선이라 부릅니다. 같은 강원도지만 이곳에서부터 기온이 낮아지고 다른 기후의 고원지대가 대관령까지 이어집니다.
안 좋은 날씨 덕분에 고속도로에는 주말임에도 차량이 많지 않아 정체 없이 오늘의 출발지인 대관령 마을 휴게소에 도착했습니다. 고속도로는 제설이 잘 되어 있었지만 대관령IC를 나와 국도에 진입하자 우려대로 눈이 많이 쌓여 있어 버스의 통행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큰길로 우회해 겨우 출발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대관령 마을 휴게소의 그 넓은 주차장이 눈꽃 산행을 하려는 산객들로 인산인해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다 같은 것 같습니다. 아마도 오늘 이곳에 대설주의보가 내린 걸 보고 새벽같이 달려온 것 같군요. 하늘에선 계속 눈이 내리고, 이미 도로와 탐방로 주변은 눈이 수북이 쌓였습니다. 기대 반 우려 반이 되는 마음으로 각자가 준비한 방한용품과 안전용품을 꺼내어 산행 준비를 합니다. 아이젠, 등산 스틱, 스패츠, 방한모자, 우의, 핫팩 등등, 배낭이 꽉 차도록 준비한 각종 장비로 중무장 완료! 철저한 준비가 편안하고 안전한 산행을 보장하기에 겨울 산행은 대충할 수 없는 것이지요.
끝이 없는 인파로 탐방로는 다행히 알아서 제설이 되어 있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면 러셀(눈을 치우며 길을 뚫는 것)을 하며 힘든 산행을 해야 하거든요.






선자령은 크게 세 개의 탐방로가 있는데, 오늘은 임도를 따라 국사 성황사를 거쳐 전망대와 정상석을 찍고 계곡길을 따라 양떼 목장으로 내려오는 12km 정도의 코스로 산행 계획을 세웠습니다. 출발지에서 잘 정비된 임도를 따라 30분 정도 가다 보면 국사 성황사가 나옵니다. 이 임도길이 오늘 같이 대설이 내리는 날이면 아주 멋진 풍경을 보여줍니다. 길 양쪽으로 촘촘히 식재된 소나무에 쌓인 설경이 크리스마스 트리를 생각나게 하지요. 마치 북유럽의 어느 숲을 연상케 하는 모습을 자아냅니다. 감성이 별로 없는 사람도 감성을 자극하게 만드는 환상의 설경이 바로 이곳입니다.
국사 성황사까지는 승용차 진입이 가능합니다. 물론 오늘 같은 날은 절대 올 수가 없지요. 국사 성황사는 절이 아니라 신당입니다. 지금은 혹한기라 굿을 안 하는 것 같은데, 날씨가 풀리면 굿하는 소리가 아주 요란하게 들립니다. 산행하면서 굿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소소한 재미가 있으니(특히 작두 타는 모습) 기회가 되면 한번 구경해 보세요.



그렇게 완만한 탐방로를 따라 좀 걸으면 강릉 시내까지 조망할 수 있는 넓은 전망대가 나타납니다. 오늘은 아쉽게도 흐린 날씨에 동해바다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대신 멋진 설경의 백두대간이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이제부터는 산 능선을 따라 걷는 구간인데, 선자령의 바람을 제대로 체험할 수 있는 구간의 시작인 셈이지요.
사실 선자령은 등산이라기보다는 트레킹에 가까운 산행지입니다. 출발점인 대관령의 고도가 800m, 완만한 경사가 정상까지 이어지기에 산 높이에 비해 크게 힘들이지 않고 편안하게 산행을 즐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초보 산행인들도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명소가 되었지요.


백패킹 성지로 알려진 풍력 발전 단지로 들어서면서 또다른 환상적인 뷰가 펼쳐집니다. 방금 전까지 눈 폭풍을 맞으며 한치 앞도 안 보이는 길을 걸어왔는데, 믿기지 않을 정도의 맑은 하늘이 우리를 반
깁니다. 하늘은 겨울의 숨을 고르게 풀어 놓고, 구름은 밝은 햇살에 떠밀려 흘러가며 바람의 길을 열고 있습니다.
언덕 위에 서 있는 풍력 발전기는 멀리서 보면 거대한 표식처럼 보입니다. 자연과 인간이 잠시 합의한 흔적처럼, 그 자리에 서서 바람을 기다리고 있어요. 모진 바람에 날개가 돌아가면 겨울의 시간이 조금씩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거센 바람에 초원에는 눈이 모두 땅을 덮지 못한 채 남아있습니다. 하얀 겨울과 갈색의 땅이 서로 밀어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공존하는 모습은 선자령만이 가진 신비로운 겨울의 풍경입니다. 그 위를 걷고 있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마치 풍경의 일부처럼 급하지가 않습니다. 누구도 앞서려 하지 않고요. 눈 앞에 펼쳐진 압도적 풍경을 즐김에 있어, 서두르지 않는 마음이야 말로 우리가 이 장면을 오래도록 충분히 기억할 수 있게 하는 자세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하얀 설원의 중심에서 나는 산객이 아니라 그냥 겨울 한가운데 놓인 작은 점과 같은 존재가 아닐지요.




오늘은 유독 강풍이 심했습니다. 괜히 강풍주의보가 내린 게 아니네요. 인산인해 산객들로 정상석 인증샷도 웨이팅이 있었답니다. 강풍과 추위, 간식 먹을 만한 장소가 없어서 겨우 정상 아래 숲속에서 따듯한 음료와 준비한 간식으로 후다닥 허기를 채웠습니다.
이제부터는 강풍을 피하고자 계곡길로 하산을 합니다. 산객들의 대부분은 왔던 길로 원점 회귀를 합니다. 필자의 경험상, 왔던 길로 하산을 하면 올라오는 산객들과 교행하기 힘든 탐방로에서 서로 비켜주며 내려와야 하므로 시간이 많이 지체됩니다. 그래서 선자령을 몇 번 경험해 본 사람들은 같은 코스로 하산하지 않고 계곡길을 따라 하산하는 걸 선호합니다. 계곡길로 올라오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어서 정체 구간이 전혀 없거든요. 특히, 계곡길은 나무 그늘이 많고 맑은 계곡을 따라 숲속을 지나오는 코스라 한여름에도 아주 시원하게 산행을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코스입니다.








사진으로 다 담을 수 없는 엄청난 장면들이 있었습니다. 이건 직접 겪어 봐야만 알 수 있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음에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합니다. 한겨울의 야외활동은 정말 즐기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쉽지 않은 선택입니다. 하지만 일단 자연 속으로 들어오면 고민했던 순간들이 쓸데없는 시간이었음을 후회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습니다. 필자도 몇 번이나 선자령을 와 봤지만 오늘 같이 환상적인 경험은 처음이고 앞으로도 경험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하는데, 오늘이 바로 겨울 산행의 백미를 경험할 수 있었던 그 타이밍이었지요.
우리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야 할 이유는 분명합니다. 아직 경험하지 못한 하늘 아래 멋진 자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가수 싸이의 노래 가사처럼 “인생을 즐기는 네가 챔피언!”입니다. 모두가 챔피언의 인생을 살아가는 2026년이 되면 좋겠습니다.
글과 사진 / 기술연구소 선행기술개발그룹 김용준 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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