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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문화로 배우다

[테마 피플] 프리드리히 엥겔스, 마르크시즘을 만들다

‘의리’는 왠지 사나이, 동양인, 무공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나 통할 것 같은 단어다. 서구 유럽에서 의리를 찾아본다면 역시 ‘기사도’ 같은 케케묵은 개념들만이 떠오를까. 근현대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꼽히는 카를 마르크스와 그의 동반자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교우는 의리의 새로운 표본으로 읽힐 것 같다.

 

요즘 의리의 상징으로 모 남자탤런트가 떠오르듯이, 역사에서도 ‘의리’ 하면 ‘이 사람!’하고 떠오르는 인물이 있을까. 단연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년~1895년)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역사에서 의리란 대개 주군과 신하 간에 지켜져 왔다. 권력 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사람이 지키는 경우보다 아랫사람이 바치는 조건 없는 충성이 절대적으로 많았다. 피를 나눈 사이가 아님에도, 평등한 관계임에도 의리를 지켰던 사람은 상대적으로 찾기가 힘들다. 여기 카를 마르크스의 친구이며 그 자신이 위대한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소개한다.

 

▲ <사진1> 좌: 엥겔스 / 우: 마르크스출처: www.fridge.gr


엥겔스는 독자적으로 소개되는 법이 거의 없고, 카를 마르크스의 친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엥겔스는 마르크스와 더불어 보통사람의 입에 담기 어려운 이름이기도 했다. 지금이야 두 사람의 공동 저작인 「공산당 선언」이 대학 교양수업 교재로도 쓰이는 세상이지만 ‘민주’보다는 ‘반공’이 중요했던 시기에는 엥겔스와 마르크스를 입에 올리는 일이 금기시되었다. 우리나라의 분위기와는 별개로 마르크스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사상가이자 역사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일례로, 지난해 11월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학자들의 영향력을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는데, 그 1위를 역사학 분야에서 카를 마르크스가 차지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공동 연구자이자 동료 활동가였으며 마르크스의 사상을 정리하고 전파한 인물이다. 정치적 편향을 제거하고, 그의 생애를 따라가 보려 한다.



방직회사 경영주의 아들


엥겔스는 1820년 독일 라인 주에서 태어났다. 알려졌다시피 그의 아버지는 방직회사 ‘에르멘&엥겔스’를 경영하는 자본가였다. 아들이 대를 이어 경영에 뛰어들기를 원했기에, 엥겔스는 아버지 뜻에 따라 브레멘 상사라는 회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경영기술보다 노동자들이 고통받는 현실을 먼저 발견했다. 17세에 시집을 낼 정도로 글재주가 좋았기에 엥겔스의 손을 거쳐 당시 독일 사회를 고발하는 칼럼들이 쏟아져 나왔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엥겔스는 유명한 저널리스트로 인기를 끌었다.

스무 살이 넘은 1841년, 엥겔스는 베를린에서 포병연대에 지원했고, 군 복무를 하면서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청강했다. 200여 년 전 독일에서는 학자와 자본가의 길이 다르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엥겔스는 대학준비과정, 우리 식으로 하면 고등학교쯤에 해당하는 김나지움(Gymnasium)을 중퇴하고 회사에 다닌 터였다. 군 복무를 다 마치고 나서 엥겔스가 간 곳은 산업화가 한창 진행 중이던 영국 맨체스터였다. 맨체스터에는 에르멘&엥겔스의 영국 지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영기술은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이때의 경험과 연구로 나온 것이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1845)라는 역작이다.
 

 

 

카를 마르크스와의 역사적 만남

 

▲ <사진2> 칼 마르크스

ⓒ WikiMedia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첫 만남은 1844년 이루어졌다. 엥겔스가 독일로 돌아가던 길에 파리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오늘날에는 이 두 사람의 사상이 ‘마르크스주의’, 잘해봤자 ‘마르크스-엥겔스주의’로 불리지만 첫 만남에서 좀 더 명망 있던 사람은 엥겔스였다. 마르크스는 대학에서 철학과 역사학을 전공한 신출내기 학자라 할 수 있었고, 엥겔스는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저널리스트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공동저술은 기여도와 관계없이 엥겔스의 이름이 먼저 표기되기도 했다. 세간의 평가를 뒤로하고 엥겔스는 마르크스 앞에서 자신을 낮췄다. 마르크스는 악필로도 유명한데, 그의 글씨를 알아보는 사람은 엥겔스가 유일했기에 다시 베껴 쓰는 조수 역할까지 해야 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엥겔스야말로 진정한 ‘대인’이었다.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사상가이자 혁명가였다. 그들은 책만 쓴 것이 아니라 행동에 나섰다. 그들이 살았던 시기 유럽은 ‘1848년 혁명’을 겪고 있었다.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폴란드, 헝가리 등지에서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자신들과 비슷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조직하고, 유럽 여러 나라의 혁명에 관여했다. 특히 군 복무를 했던 엥겔스는 독일 남부 지역에서 무장투쟁을 하기도 했다. 무장투쟁이 실패한 이후에는 마르크스와 함께 영국 런던으로 거처를 옮겼다.

 

 

동지에 대한 아낌없는 지원

 

▲ <사진3>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동상

 ⓒ Bente Jensen


1850년 무렵 마르크스는 필생의 저작인 「자본 : 정치경제학 비판」, 다시 말해 「자본론」 집필에 들어간다. 동시에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방대한 학문적 작업을 마무리하도록 돕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선택했다. 망명 초기, 영어에 서툴렀던 마르크스의 글은 엥겔스의 번역이 있어야 했다. 학문적, 심리적 지원만이 아니었다. 재정적 어려움으로 맨체스터에 있는 방직공장으로 돌아간 엥겔스는 1869년 자신이 은퇴할 때까지, 그리고 1883년 마르크스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마르크스를 물질적으로 지원했다. 이후로는 친구의 자녀들을 돌봤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혁명적이었지만, 그 생활관념은 동시대인과 비슷했다. 마르크스는 아내 예니가 귀족 집안 출신인 것을 자랑으로 여겼고, 젊은 시절에는 부모 속을 썩이는 흔한 아들이었다. 또한, 자신의 자녀들이 교양 있는 상류 계층의 교육을 받기를 바랐다. 맨체스터의 엥겔스와 런던의 마르크스가 주고받은 편지글에서는 돈을 부쳐달라고 애원하며 가난과 질병을 호소하는 마르크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다행히 에르멘&엥겔스의 사업이 잘되었기 망정이지, 마르크스 가족의 생활비는 경영을 위협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마르크스 가족이 엥겔스에게 끼친 경제적 부담은 마르크스의 사상을 위험한 것으로 본 사람들에 의해 여전히 공격을 받는 부분이다. 그러나 엥겔스는 자신의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늘 후했다. 그것은 동정이 아니라 동지애였고, 엥겔스의 손길은 이민자와 사회주의자 등 당시 어려운 삶을 살던 사람들에게도 미쳤다.

 

 

세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

 

▲ <사진4> 프리드리히 엥겔스

 ⓒ WikiMedia


엥겔스가 다시 활발한 정치 활동을 재개한 것은 은퇴 후였다. 마르크스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유고를 정리해 출판하는 것이 엥겔스의 몫으로 남았다. 여러 나라의 공산주의자들은 엥겔스의 해석과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최초의 마르크스주의는 그의 친구 엥겔스가 만들고 퍼뜨린 사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력적으로 활동하던 엥겔스는 후두암에 걸렸고, 1895년 8월 5일에 영영 눈을 감는다. 자녀가 없던 그가 남긴 유언대로 유골은 화장되어 바다에 뿌려졌다.

 

너무 낡은 것처럼 들리는 단어, 오늘날에는 조직폭력배들이나 쓸 것 같은 의리가 2014년에 왜 이토록 유행일까.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는 누군가가 간절한 우리들의 외로움과 불안감 때문일까.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의리가 아니라 부당한 이익을 챙기는 협잡만이 판을 치는 사회상 때문일까. 목숨을 바친 사상과 평생을 지킨 의리가 아득한 전설처럼 느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글쓴이 김희연은 _ 사보와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자유기고가다. 사회, 문화, 경제 분야에 두루 걸쳐 갖가지 종류의 글을 쓴다. 글쓰기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행운을 얻어서 늘 고마운 마음을 품은 한편으로, 쓸데없는 글로 인해 웹이나 인쇄매체에 들어가는 종이와 바이트, 그리고 독자들의 시간을 낭비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 외부필자에 의해 작성된 기고문의 내용은 앰코인스토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