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깊이,
깊고 넓게 여행하는 법
궁금합니다. 여러분은 여행 준비를 어떻게 하시나요? 보통 여행 계획을 세울 때면, 먼저 시간을 따지고 비용을 따집니다. 주말이든, 명절이든, 연차를 내든, 휴가를 내든 최대한의 시간을 확보하지요. 그 다음에 활용 가능한 예산을 고려해 숙박비와 교통비, 식비에 적절히 배분을 합니다. 여행지에서 서핑을 하거나, 별을 관찰하거나, 집라인을 타는 등 액티비티에 따라서 예산이 달라지겠지요. 그리고 나면 날씨를 고려해 짐을 꾸립니다. 쌀쌀한 홋카이도로 떠날지, 뜨거운 해운대로 떠날지에 따라 준비물이 달라지겠지요. 더운 날과 추운 날, 비 오는 날과 눈 오는 날의 짐이 달라지고, 여행지에서 방문할 스폿이 계곡에서 카페로, 박물관에서 루프탑으로 바뀝니다. 그렇게 계획대로 여행을 마치고 나면 수백 장의 사진이 스마트폰에 고이 저장되지요. 그리고 우리는 ‘역시 남는 건 사진뿐!’이라고 말합니다.
정말 여행을 하고 나면 남는 것은 사진뿐일까요? 똑같은 시간을 들여 여행을 하더라도 조금 더 여행지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속초에 가서 아바이순대를 먹으며 그저 ‘맛있다’가 아니라 아바이마을에서 왜 아바이순대와 오징어순대를 만들어 먹을 수 밖에 없었는지, ‘칠성조선소’라는 카페에서 향긋한 커피를 마시는 동안, 배 목수들이 왜 이곳에서 고향에 돌아갈 배를 만들었는지를 들여다보면 그 공간이 더욱 사랑스러워집니다.
한 공간에는 시절이 끊임없이 중첩되어 쌓여 갑니다. 우리는 공간이 그려내는 현재를 보고 있지만, 그 공간에는 지나간 과거의 이야기가 차곡차곡 눌러 담겨 있어요. 여행을 가서 사진을 남기는 일은 여행지의 현재를 기록하는 일입니다. 현재의 모습에 감춰진 과거의 질곡과 영광의 시간들을 조금 더 파헤쳐보면 여행이 깊어지고 풍성해집니다. 케이크를 먹을 땐 위에 얹어진 달콤한 딸기 한 조각이 아니라 겹겹이 쌓인 부드러운 크림과 새콤달콤한 과육과 촉촉한 스폰지 시트까지 음미해야지요.
가장 크고 가까운 도시 서울에 대해 종횡무진, 그야말로 깊이와 넓이를 더해 기록한 책 두 권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책을 읽는 동안 서울에 대한 이해를 높일 뿐 아니라 다른 지역을 여행할 때 응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한양과 경성, 두 개의 조선을 걷는 시간
「당일치기 조선여행」
트래블레이블 지음 | 노트앤노트
흘끗 보아도 책 표지와 제목이 참 매력적입니다. 이미 사라진 역사 속의 조선을 여행할 수 있다니, 그것도 당일치기 여행이라니요. 보통 조선의 수도를 ‘한양’으로, 일제강점기의 수도를 ‘경성’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조선의 수도를 일컫는 공식 명칭은 ‘한성부’입니다. ‘경성’은 삼국 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널리 쓰인 이름이지만, 경술국치 이후 일제강점과 관련된 단어로 변했습니다. 이 책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는데요, 1부에서는 조선 시대의 한양으로, 2부는 식민지 조선의 경성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러면서 경복궁과 덕수궁, 정동, 성북동, 북촌에서 남산까지, 익히 알고 있는 거리를 새삼 다시 보게 만듭니다.
책의 매력 포인트 중 하나는 서울의 곳곳에서 문화유산을 해설하는 지식 가이드들이 트래블레이블이라는 그룹으로 모여 현장감 있게 엮어냈다는 점이에요. 직접 걸어보고 개발한 14개의 투어 코스를 따라 여행할 수 있어요. 16개의 지도 중에서 정동과 남산 지도에는 지금은 사라진 건물들도 등장합니다. 옛 기억을 떠올리며 지도를 읽는 기분도 쏠쏠합니다.
역사는 지루한 과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여행은 누구나 좋아합니다. 여행을 통해 역사를 이해하는 일은 의외로 재미있는 일입니다. 특히나 매일 버스를 타고 지나다니던 광화문 거리, 친구를 만나러 가던 북촌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여행이라면 더욱 흥미진진하겠지요. 내가 발 딛은 공간을 조금 더 깊이 있게 이해하는 방법을 이 책을 통해 발견보시면 좋겠습니다.
거대한 도시를 텍스트 삼은 문헌학자
「서울 선언」
김시덕 지음 | 열린책들
김시덕 교수는 도시 문헌학자로서 도시의 구석구석을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고, 도시 전체를 텍스트 삼아 분석합니다. 제목에 ‘서울’이라는 단어가 들어있어서, 서울을 문헌학자로서 여행하는 책인 줄 알았더니 그보다 더욱 더 다양한 층위의 고민과 해석이 들어있어서 놀랍고 반가웠던 책입니다.
서울이라는 도시에는 미묘한 변수들이 많습니다. 한때 백제의 수도였던 위례성, 고려의 남경,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 일제강점기의 도시였던 경성, 그리고 1914년, 1936년, 1963년에 서울이라는 행정구역으로 포함된 지역들까지 시공간을 종횡으로 아우르고 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경복궁이나 사대부가 살던 집들도 중요하지만, 서울의 모든 동네, 서울의 모든 건물은 그 모습 그대로 뜻깊게 읽어낼 거리가 무궁무진하다고 말합니다. 서울 시민이 조선 시대의 사대문 안에 주목하고, 자신이 사는 도시를 낯설게 보는 것은 도시를 보는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이지만, 이런 방법으로는 서울 사대문 바깥에 사는 나 사진이 도시의 주인공이 아닌 소외된 존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지요. 이 부분이 기존의 ‘서울’을 여행하는 수많은 책과는 다른 지점이에요.
미국의 학자인 베네딕트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책에서 하나의 바운더리에 묶인 여러 지역은 처음부터 필연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우연하게 하나로 묶인 다음부터 서로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마찬가지로 서울이라는 바운더리에 묶인 서울 사람들은 거대한 서울의 일부로서 지금도 서울의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책이 소중한 이유는 수많은 사람들이 사대문 안의 궁궐과 관청과 독립운동 유적을 이야기할 때, 눈에 띄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서울의 구석구석을 들춰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도시와 공간에 대한, 일상에 대한 새로운 영감을 얻고 싶다면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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