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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해외 이모저모

[일본 특파원] 가부키 이야기

by 앰코인스토리.. 2023. 11. 13.

일본의 ‘가부키(歌舞伎)’라고 들어보셨는지요? 일본 애니메이션 등을 통해 아마 얼굴에 새하얀 분칠을 한 인물들을 보신 적이 있을 것 같습니다. 가부키에 대해 잘 몰랐던 필자도 처음에는 정말 특이한 모습을 하고 공연을 하는 가부키의 모습이 매우 낯설었는데요, 나중에 더 놀랐던 것은 바로 모든 극중 인물이 남자들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혹시 필자처럼 궁금하셨던 분들을 위해 이번 호에서는 가부키에 대해 소개하려고 합니다.

 

영상출처 : https://youtu.be/1KxDVAUghWY?t=105

 

가부키는 일본의 전통 공연 예술입니디. 모든 출연자가 남성이며, 여성 역을 맡은 배우는 여성적 발성으로 공연을 합니다. 가부키란 말은 ‘머리를 기울이며 맘대로 춤을 추기’란 의미를 가진 ‘가부쿠(傾く, かたむく)’란 단어에서 유래되었고 가부키라는 단어로 정립된 것은 에도 시대에 이르러서입니다.

 

사진출처 : https://ja.wikipedia.org

에도 시대의 민중극인 가부키는 17세기 초엽에 생긴 것이므로, 현재까지 약 370년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최초의 가부키를 창시자는 교토의 기타노신사에서 이즈모 오쿠리라는 여성이 염불 춤을 추어 많은 시민들의 인기를 얻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춤을 가부키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1603년이었는데요, 이 시대의 공연 예술은 궁중이나 불교에서의 무악이나 신악 등만 있었고 민중 예술이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더욱이 공연 예술은 가면을 쓰던 시대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여성의 예능 집단이 몰려들고, 더욱이 가면도 쓰지 않고 다채로운 의상을 휘날리며 풍만한 지체를 보이면서 노래하며 춤을 추니, 사람들이 그 처음 보는 광경에 흥분하고 인기가 있던 것은 능히 짐작이 가는 일이었겠지요. 이전에도 떠돌이 여성 연기인들이 서민들을 대상으로 연기를 하며 인기를 얻기는 했으나, 이들은 풍류 춤을 추는 유녀들이었습니다.

 

영상출처 : https://youtu.be/oidE2SSDczw

 

그러나 그 여자 연기인이 단순한 나그네 연기인으로서가 아니라 비록 빈약한 임시 건물이었기는 하나 교토의 한복판에 당당하게 건물을 세우고 생생하게 보여 주는 쇼를 한다는 것은 세키가하라 전투(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사후에 토요토미 정권 내부에서 비롯된 전쟁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총대장으로 벌인 전쟁. 이 전쟁의 결과로 토요토미의 지위가 상실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가 1603년에 끝나고 난 후에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인 가부키는 그 당시 전국을 뒤흔들었으나, 유녀를 겸하고 있는 본래의 성격 때문에 미풍양속을 크게 어지럽게 하였고, 에도 막부는 마침내 1629년 여자 예능인의 등장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리하여 메이지 24년 신파(新派)에서 여자 배우가 등용될 때까지인 262년간은 일본의 공인 극장에서는 여자 배우를 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성들의 공연 대신에 어린 소년들의 노래와 춤으로 이뤄지는 와카슈 가부키가 인기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도 유녀와 다름없는 폐단이 심해져 막부는 1652년 와카슈 가부키를 금지하는 금지령을 내립니다. 금지한다고 한들 민중들의 요구를 멈출 수는 없었고, 드디어 가부키는 형태를 바꾸어 다시 흥하기 시작하였고, 새로이 극(劇)으로서의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인 남성만 출연하는 ‘야로 가부키(野郞 歌舞伎)’의 시작입니다.

 

사진출처 :  https://namu.wiki

와카슈 가부키 (わかしゅかぶき, 若衆歌舞伎)

막부는 이를 허가하는 조건으로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배우의 앞머리를 잘라 어린 소년의 모습이 아니게 할 것과, 다른 하나는 노래와 춤을 적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같이 선전성을 규제함으로 가부키는 성적 매력이 아닌 드라마로서의 내용에 충실하게 되었고, 그 무대 표현의 변화성과 규모의 확대, 연기의 사실성으로 향하게 되었고, 이것은 연극으로서는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야로 가부키 (やろうかぶき, 野歌舞伎)

이후 1664년에는 에도와 오사카 등지에서 다막물이 처음으로 공연하기 시작하였고, 1670년대에는 교토와 오사카, 에도 등지에서 가부키 연기의 기초가 정립되기 시작했습니다. 큰 도구들도 점점 발달하기 시작했고 무대의 형태도 계속 확장되었습니다. 반 야외였던 무대가 점점 실내극장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내용면, 양식면에서도 중세를 탈피하며 에도 시대의 독특한 서민을 위한 연극으로 확고해지게 되었습니다. 조루리(浄瑠璃)는 일본의 전통 예능에서 반주에 맞추어 이야기를 읊는 행위를 말하는데, 1724년까지는 인형을 사용하는 닌교 조루리라는 명작 조루리가 공히 가부키에 전면적으로 채용되게 되어 예술적으로 대성공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닌교 조루리의 극작가인 자카마쓰 몬자에몬이 사망하며 1803년은 겨우 문화문정(文化文政)의 난숙 시대에 들어가려는 전회점(轉回點)에 들어가게 됩니다.

샤미센 (しゃみせん, 三味線)

일본의 가장 대표적인 현악기로 민요의 반주나 근세 일본 음악의 대부분의 종목에 사용됩니다. 3현의 발현악기로, 여러 종류의 음악 연주에 사용되고 있는 샤미센이 가부키의 연기나 연출에 크게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부터 비로소 요즘과 같은 음악이 함께하는 양식을 갖추게 되기에 이르렀으며, 샤미센의 음악이 발달함에 따라 무용극도 함께 발달이 촉진된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871년은 막부 말기의 가부키의 타성이 종국(終局)에 이르는 해입니다. 이 시기에는 에도에서 가난한 서민을 리얼하게 그려내는 세정교겐(世情狂言)이 속속 생겨나오고, 요괴무용(妖怪舞踊)도 받아들여져 복잡한 무대 기구, 트릭, 연출, 게자음악 등이 매우 정교하게 완성되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메이지 21년(1888년), 신파가 발생하고 40년(1907년)에 신극 운동이 일어나는 정황 속에서 가부키는 결국 전통 연극과 고전 예능으로서 계승된다는 기본선(基本線)을 정하게 되었습니다. 가부키는 여자는 남장을 하고 남자는 여장을 함으로 반 자연적,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이 특징이며, 부모와 자식의 관계일지라도 극에서는 스승과 제가가 되는 전통이 있습니다.

게자 음악 (下座音樂)

가부키는 무엇보다도 형태를 중요시합니다. 즉, 진행 중인 무대의 어느 한 순간을 잘라서 들여다보아도 배우 개개의 모습으로부터 다른 배우와의 균형, 위치, 또 의복, 가발, 소도구, 무대장치 등과 어울려 항상 한 폭의 그림이 되어있게 합니다. 가부키의 연출에서 일관되고 있는 것은 그 양식성입니다. 더욱이 대사는 리드미컬한 표현 형태를 취한 채 게자음악을 수반하고, 무대 효과에 해당하는 비, 바람, 물소리, 또한 눈 내리는 소리마저도 음악화해서 표현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가부키는 일종의 뮤지컬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양식적이라고 해도 그 연출 내용은 매우 복잡합니다. 그 연극사(演劇史)가 보여주듯이 민속 예능, 노, 노교겐, 닌교 조루리의 영향을 받아 그것이 가부키 속에서 발전해감과 동시에 가부키 자체에서도 시대의 움직임이라든가 배우나 작가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경향을 지닌 연출이 생겨나고 또한 이것이 전개되어갔습니다.

 

요즘도 가부키의 공연은 가부키 공연장에서 정규적으로 공연되고 있으며, TV 방송으로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호는 최근 신주쿠의 아름다운 일루미네이션을 보면서 여기에서 마무리합니다.

 

영상출처 : https://youtu.be/AMszv_JDMYw?t=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