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정의로운가?
살인자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이유
2015년 OECD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사법제도에 대한 신뢰도가 27%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회원국의 평균 신뢰도 54%임을 고려하면 그의 절반 수준입니다. OECD 국가만으로 비교한다면 한국은 칠레에 이은 꼴찌에서 두 번째이고, 인도네시아나 터키, 브라질보다 낮은 수준이에요.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83%이고, 인도가 67%인 것에 비하면 안타까운 수준을 넘어 참담할 지경입니다.
2015년 대법원 사법정책연구원이 조사한 자료에서는 ‘재판 절차가 공정하게 진행된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71%가 ‘사회적으로 힘 있는 사람들이나 절차를 악용하는 사람들에게 유리하다’고 답했습니다.
홍성수 교수는 「법의 이유」라는 저서에서 ‘재판이란 법정이라는 한계 내에서 최대한의 진실을 찾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인간이 100%의 진실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게다가 법정에는 정해진 규칙과 제한된 시간이라는 제약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정은 최선을 다해 진실을 찾아내고 법에 따라 판결을 내려야 합니다. 홍성수 교수는 이 부분에서 법관과 시민들의 생각에 괴리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시민은 늘 부족하다고 느끼고, 법관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느낀다는 거지요.
이 차이는 왜 벌어지는 걸까요? 어떻게 하면 이 괴리를 줄일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법을 멀게 느낍니다. 한자를 병기한 법률 용어는 마치 외계어 같습니다. 하지만 법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서 작용합니다. 층간 소음에 눈살을 찌푸릴 때,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차가 쌩쌩 달릴 때, 지하철에서 누군가 원치 않는 접촉을 시도할 때, 집주인이 갑자기 월세를 올릴 때 우리는 예의범절에 앞서 법을 찾곤 합니다. 어쩌면 법은 우리의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법을 다룬 2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왜 살인자에게 무죄를 선고했을까?」라는 책과 「법의 이유」라는 책입니다. 앞의 책은 실화를 소재로 법의 한계를 말하지만 과연 그것이 정의의 한계인가 의문을 던집니다. 뒤의 책은 영화와 문학을 소재로 삼아 법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할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왜 살인자에게 무죄를 선고했을까?」
페르디난트 폰 쉬라크 지음, 이지윤 옮김, 갤리온
변호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페르디난트 폰 쉬라크
1994년부터 독일 베를린에서 형법 전문 변호사로 활동한 저자는 25년 동안 접했던 2,500여 건 사건 중에서 충격적인 12가지 실화를 엮어 책을 냈습니다. 이 책은 누적 판매량 100만 부 이상을 기록하며 독일 아마존에서 50주 동안 베스트셀러를 차지한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의 후속작입니다. 전작에서는 범죄자들의 인생을 돌아보며 그들을 변호하는 이유에 대해 기록했다면 이번 책은 판결을 내리기까지의 과정과 의미를 돌아보게 만들지요. 전작에서는 페르디난트 폰 쉬라크가 1인칭으로 등장해 사건을 설명하며 이야기를 전개하기도 하지만, 이 책은 저자가 전혀 개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영화 같고 소설 같습니다. 아마 페르디난트 폰 쉬라크의 전작들을 읽어보신 분이라면 그의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에 환호를 보내실 겁니다.
법의 판결은 과연 정의로운가?
처음 이 책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을 때 얼마나 흥미로웠는지 몰라요. 책에 나오는 사건들은 모두 실화인데다 법정에서 판결이 마무리된 이야기들입니다. 사업 실패로 빚더미에 오른 남편을 총으로 쏜 아내, 갓난아기를 던진 엄마, 여성들을 인신매매한 남자, 술을 마시고 마약을 운반한 남자 등 범죄를 저지른 (혹은 범죄를 저질렀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이 무죄 판결을 받은 사건들을 담았습니다. 사건을 다룬 한 편의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우리는 법과 정의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몇 번의 범죄 경력이 있는 남편이 아이를 죽였습니다. 아내는 남편 대신 아이를 살인한 죄를 뒤집어씁니다. 법정에서는 아내가 아이를 죽였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언론은 그녀에게 ‘잔인한 엄마’라는 별칭을 붙였습니다.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아내는 남편을 죽였습니다. 이번에는 법정에서 아내가 남편을 죽인 증거를 찾지 못했지요. 저자는 사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대신 사건의 끄트머리에 ‘증거재판주의’라던가 ‘무죄추정의 원칙’ 같은 법률용어를 무심하게 덧붙입니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12개의 사건 기록
그저 벌어진 일을 서술할 뿐이지만 놀라운 이야기의 힘이 느껴집니다. 페르디난트 폰 쉬라크가 왜 ‘실존주의 문학의 아버지 카프카’와 ‘독일의 천재 극작가 클라이스트’를 잇는 이야기꾼이라는 찬사를 받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법은 감정이 아닌 사실만을 다룹니다. 법은 정의나 윤리 대신 증거만을 내세웁니다. 법은 범죄만을 들여다볼 뿐 범죄를 저지른 인간의 삶을 다루지 않지요. 하지만 페르디난트 폰 쉬라크는 사건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범죄를 저지른 인간을 주목합니다. 그리고 법정에서의 진실이란 무엇인지 질문합니다. 웬만한 법정 드라마를 뺨치는 그의 생생한 기록에 감탄하며 이야기를 읽어내려가다가 사건이 마무리되면 우리가 익히 아는 법 조항들이 왜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작용하는지, 인간이 만들고 집행하는 법이 과연 공정한지 아닌지 고민하게 됩니다.
「법의 이유」
홍성수 지음, 아르떼
법의 이유와 역할을 고민하는 홍성수 교수
홍성수 교수의 전작을 소개해드린 적이 있었지요. 2018년에 발간된 「말이 칼이 될 때」를 기억하시나요? 이 책에 실린 표현의 자유, 차별금지법, 인권법에 대한 내용들은 혐오표현, 미투 운동, 소수자 인권과 관련된 다양한 사건들과 맞물리면서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법의 역할을 고민하게 했습니다.
홍성수 교수의 신작 「법의 이유」는 숙명여자대학교에서 강의한 <영화를 통한 법의 이해>라는 과목을 엮어낸 책입니다. 재미와 교양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아낸 강의가 이렇게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법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친숙한 영화와 소설을 소재로 삼아서 ‘법의 이유’를 풀어내기 때문이지요. 영화와 문학작품 속의 상황을 바탕으로 현실에서 법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배웁니다.
현실보다 현실 같은 영화 속의 법
책은 크게 2부로 구성됩니다. 1부에서는 주로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다루는 형사소송에 대해 다루고, 2부에서는 다양한 개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민사소송에 대해 다룹니다.
형사 소송을 다루는 1부에서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수의견」, 「부러진 화살」이라는 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공공의 적」을 통해 우리가 영화에서 자주 접했던 ‘정당방위’, ‘미란다 원칙’의 개념을 설명하고,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 왜 자백을 증거로 내세울 수 없는지 등을 알아봅니다. 영화 「데드 맨 워킹」,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들어 사형제도를 폐지할 수 있을지 묻습니다.
민사 소송을 다루는 2부에서는 기업과 개인 사이의 소송이라던가, 개인 사이의 약속을 어떻게 법적으로 판단할 것인지 「에린 브로코비치」 같은 영화나 「베니스의 상인」 같은 문학작품, 「허슬러」라는 잡지 등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카트」나 「미생」을 예로 들어 노동법을 설명하고, 「포레스트 검프」나 「오아시스」를 통해 장애인의 권리와 차별 금지법에 대해 고찰합니다. 영화 「범죄도시」와 「청년경찰」에서 나타나는 혐오 표현을 들여다보며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 가능한지 생각해봅니다.
알고 보면 가까이에 있는 법
온라인 뉴스 끄트머리에 달리는 댓글들 중에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으니 무조건 사형을 시켜야 한다’, ‘왜 내가 낸 세금으로 교도소에 에어컨을 달아줘야 하느냐’, ‘위안부는 자발적인 선택이었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해서 불편하다’, ‘공인이니까 꼭 속옷을 갖춰 입어야 하는 것 아니냐’ 같은 댓글들입니다. 사람들은 댓글에 활발하게 찬반을 표시합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우리가 어떤 근거로 ‘좋아요’나 ‘싫어요’를 눌러야 할지 결정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적어도 법적인 근거를 이해하고 도덕적인 이유를 구분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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