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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일상다반사

[에피소드] 설렘

by 앰코인스토리 - 2016. 8. 5.


어릴 때의 ‘놀이’라고는 머슴애들은 땅바닥에 여러 개 구멍을 파놓고 돌을 던져 넣거나 자치기를 하고, 계집애들은 줄넘기나 공기놀이를 하는 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리 동네에서 남녀 어린이들이 공동으로 즐기는 게 있다면 숨바꼭질이 유일했다고 기억된다.


가을걷이를 끝내고 잠자리가 하늘을 날기 시작한 해 질 무렵, 나와 친척뻘인 여동생은 세무서원이 술 단속을 나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불법으로 제조한 막걸리 항아리를 짚 붓대기 쌓아놓은 곳에 감추어 두곤 했던 그 구멍 속으로 기어들었다. 양손으로 가슴을 감싸고서 몸을 최대한으로 웅크리며 숨까지 참고 있는데도 심장은 그렇게도 콩닥거렸는지…. 그때의 설렘을 나이 들어서도 자주 회상하곤 했다.


이번에는 손자가 체스판을 들고 나타났다. 거실에 앉자마자 판을 펴고는 순번을 정하자면서 가위바위보부터 내민다. 말들을 놓으면서 러시아어로 된 말 이름과 규칙을 알려준다. 이 말은 앞으로만 가고 저 말은 옆으로만 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머리에 입력이 되질 않으니 어쩌면 좋을까. 장기와 비슷하리라고 어림잡고는 전진을 해보지만, 규칙을 익히고 여러 번 연습한 손자에게 적수가 될 리 없었다. 쉽게 이겨 재미가 없는 터라 더는 조르지 않고, 사위하고 대적하게 되었다. 사위가 설명서를 보면서 시간을 많이 끌기에, 속으로 ‘처남과 내기하는 것도 아닌데 져주면 안 되나.’라며 못마땅하게 바라보지만 양보하질 않고 느긋하게 한 수, 한 수를 두니, 싫증이 난 손자는 불평 한마디 안 하고 안방의 할머니와 놀다가 자기 둘 때만 나타나곤 하더니 결국 지고 말았다. 은근히 화가 치미는지 “할아버지! 놀이터에 가서 공 차기 하자.”라며 손자는 공을 챙기고 나는 녀석의 물병을 뒷주머니에 꽂았다.


우리 동 앞의 제1놀이터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 제2놀이터로 가면서 손자가 공을 굴리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아가는데 “아파, 아파.”하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무릎을 감싸 쥐고는 안절부절못한다. 시멘트 바닥에 엎어지면서 살갗이 까져 피까지 비쳤다. 옛날의 우리라면 고운 모래가 즉효 약이지만, 상처 부위를 입김으로 불어주면서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그나저나 내일이 인근 네 개의 초등학교 1학년생이 모여서 공 차기 시합을 한다는데 나 때문에 사달이 나는 것은 아닌지, 회한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아들은 별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4대에 걸쳐 처음으로 선수(?)가 나왔는데 걱정이 안 될 수야 있는가.


아픔이 가시질 않는지 소파에 비스듬히 눕더니, 나를 쳐다보며 눈을 자꾸 깜박거린다.

“눈에 무엇이 들어갔니?”

“아니, 짝꿍이 결혼하자면서 눈을 이렇게 하기에 운동장을 세 바퀴나 돌고 도서관으로 도망쳤어.”

“사귀면 되잖아.”

“벌써 결혼하기로 약속한 애가 있는데 어떻게 그래.” 

이사까지 해서 가끔 엄마들끼리 전화할 때 자기들도 연락한다지만, 한결같은 손자의 마음에 사부인이 걱정까지 한다고 해서 웃음이 나온다. 옆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던 유치원생인 손녀도 “나도 결혼할 애가 생겼는데…. 새로운 짝꿍이 결혼하자고 해서 손가락을 걸었어. 다음에 아빠하고 유치원 소풍을 가잖아. 아빠도 볼 거야.” 한다.


그 옛날의 나와 손주들의 설렘은 얼마나 같고, 얼마가 다를까? 그게 못내 궁금하다.


글 / 사외독자 이선기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