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정유년(丁酉年)의 해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지구가 스스로 열심히 돌면서 동시에 태양을 온전히 한 바퀴 여행하기를 마치는 그 날이 멀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지금이야 당연한 과학적 사실로 알고 있지만, 그러나 불과 5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살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의 지동설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기원전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구중심설을 의심 없이 받아들여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믿고 살았으니까요. 이후, 지동설을 좀 더 과학적인 방법과 발견으로 주장한 인물이 있었지요. 바로 ‘갈릴레오 갈릴레이’입니다.


▲ Justus Sustermans의 갈릴레이 초상화

사진출처 :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


그는 1564년 이탈리아 피사에서 빈센초 갈릴레이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의 성과 이름이 비슷한 이유는 당시 장남에게는 성과 이름을 겹쳐 쓰는 토스카나 지방의 풍습 때문이라고 하지요. 의사가 되기를 강력히 원했던 아버지 때문에 피사대학 의학부에 진학하였으나 수학의 강한 매력에 끌려 의학공부를 중단하고, 토스카나 궁정의 수학자였던 오스틸리오 리치에게 수학과 과학을 배우게 됩니다. 1592년에는 피사대학의 수학강사에 이어 파도바대학에서 자신이 훗날 부정하게 될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포함한 천문학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고체의 무게중심과 운동, 낙하하는 물체의 등가속도 법칙 등을 연구하여 이론적으로 증명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습니다.


천문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갈릴레이는 1609년 네덜란드에서 망원경이 발명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직접 연구하기 시작, 곧 3배율 망원경을 만들었으며 뒤이어 32배율까지 성능을 높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것을 천체관측에 처음으로 이용하기 시작했지요. 그때 그가 처음 알게 된 사실들, 달의 표면이 매끈하지 않고 울퉁불퉁 하다는 것, 목성도 그것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4개의 위성을 갖고 있다는 것, 태양의 흑점이 존재하는 것, 은하수, 토성의 띠 등을 발견하며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놀라울 정도로 획기적인 사실들을 알아내었습니다. 1610년에는 이러한 관측결과 내용을 실은 ‘별세계의 메신저’를 출판하여 업적을 인정받아 파도바대학의 종신교수로 초빙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연구에만 몰두하게 됩니다.


▲ 1610년 갈릴레오에 의해 관측된 금성의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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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레이가 그린 달의 표면(좌), 현대위성이 찍은 달의 표면(우)

사진출처 : 다음백과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63XX18700088



이 무렵부터 갈릴레이는 자신의 천문관측과 연구를 바탕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믿음을 더욱 굳히게 됩니다. 결국 1613년에는 태양의 흑점이동을 근거로 코페르니쿠스가 옳고 프톨레마이오스가 틀렸다는 내용의 글을 쓰게 되는데요, 이는 1400여 년 동안 확고한 우주관으로 자리 잡아 온 지구중심설의 프톨레마이오스 추종자들과 구교였던 로마 교황청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습니다. 구교도와 신교도가 대립하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과학의 진리 여부를 떠나 자신들에 대한 명예훼손과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지요. 갈릴레이 역시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1614년 로마 가톨릭 사제들은 갈릴레이의 이론을 이단으로 규정했고, 1616년에는 코페르니쿠스의 책도 금서로 지정되었습니다. 추기경 로베르토가 갈릴레이에게 개인적인 서신을 보내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을 옹호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는 1차 재판, 경고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갈릴레이의 연구와 집필은 계속되었습니다.

출처 : 네이버 블로그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pink-madam&logNo=221103981858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


▲ 갈릴레오의 망원경, 내셔널 지오그래픽 400 주년 기념

사진출처 : http://www.crystalinks.com/galileo.html


1623년에 발표한 그의 저서 「황금측량자」에서는 천동설의 방법적 오류를 예리하게 지적하고, 수학적 논리로 쓰인 공간이 바로 우주라며 자신의 과학관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그의 숙원이었던 저서가 완성되었는데요, 1632년 피렌체에서 인쇄된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라는 책이었습니다. 1차 경고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우회적인 방법으로 천동설의 오류를 지적하고 지동설을 확립하려고 시도했던 저서였지요. 그러나 책의 요지를 간파한 예수회에서는 이 책이 루터나 칼뱅의 설교를 합친 것보다 더 나쁘다고 주장하여 로마교황청의 금서목록에 올랐고, 화가 난 교황 우르바누스 8세는 갈릴레이를 이단 행위로 종교재판에 회부시키게 되었습니다.


▲ Galileo's geometrical and military compass, thought to have been made c. 1604 by his personal instrument-maker Marc'Antonio Mazzoleni

사진출처 : 위키백과 https://en.wikipedia.org/wiki/Galileo_Galilei


1633년 갈릴레이가 69세가 되던 해에 2차 종교재판 공개심문을 받은 뒤 갈릴레이는 자신의 잘못을 선언하고 모든 주장을 철회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의 모든 저서는 금서로 지정되었고 죽을 때까지 피렌체 자신의 집에 가택연금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1638년에는 시력마저 잃었는데 무리한 천체관측과 저술로 인해 생긴 안타까운 결과라는 이야기가 있지요. 이때마저도 그는 딸의 도움을 받아 집필을 계속했는데요, 그의 마지막 대작이 된 저서 「두 개의 신과학에 관한 수학적 증명」이 완성되자 로마교황청을 벗어나 신교국이었던 네덜란드에서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 갈릴레오의 cannocchiali 망원경

사진출처 : 위키백과 https://en.wikipedia.org/wiki/Galileo_Galilei


그리고 결국 1642년 심계항진으로, 시대를 앞서간 천재로서 다사다난했던 그의 생은 마감되었습니다. 훗날 그가 죽은 지 350년 후,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이 재판이 잘못된 것임을 최종적으로 인정하고 죽은 갈릴레이에게 공식 사과하였다고 합니다. 최첨단 과학을 자랑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기하고 매력 있는 천체관측, 그 옛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고 과학적인 접근으로 정확한 발견까지 할 수 있었을까 놀랍기만 한데요, 저물어 가는 한 해, 멀리 반짝이는 별들을 올려다보니 그때도 이렇게 하늘을 호기심으로 바라보았을 역사 속 한 천재가 떠오르네요.




글쓴이 한지숙

글에도 다양한 표정이 있다고 믿는 자유기고가. 얼굴을 직접 마주하지 않는 인터넷 공간이라 할지라도 글을 통해 많은 이들과 마음을 나누기를 희망한다. 이를 위해 오늘도 열심히 거울 대신 키보드로 표정 연습에 열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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