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접 재배한 고추를 받으면 기분이 참 좋다. 물론, 가까운 시장에 가서 1천 원짜리 몇 장을 내면 모양이 예쁘고 맛이 좋은 고추는 얼마든지 살 수 있다. 하지만 농부의 정성이 담긴 고추면 그 모양이 좀 생겨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꼭 많은 양이 아니어도 좋다. 주인장의 마음이 담긴 양이면 개수는 문제될 것도 없다. “혼자 먹기에는 양이 많고 그냥 버리기 아까워서 몇 개 담아 왔어요!”라는 말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그 말에 진의 여부를 떠나 싱싱한 고추를 가지고 왔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지인은 가까운 텃밭을 활용해 이것저것 심었고, 거기서 수확물이 생기면 나눠주려고 항상 노력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 마음에 항상 감사하고 있다. 하얀 비닐봉투 안에 정말 막 생긴 고추들이 여러 개 들어있었다. 다소 꼬깃꼬깃한 봉투 모양을 봐선 처음부터라기보다는 즉흥적인 마음이 생기는 바람에 손에 잡히는 봉투에 담아 들고 온 모양이다.
봉투 안으로 얼굴을 집어넣어 보았다. 청양고추는 아삭이고추와는 모양이 달라서 육안으로 보면 금방 구별할 수 있지만, 아삭이고추를 위장한 청양고추가 간혹 있어서 냄새부터 맡아 보게 된다. 코끝을 자극하는 강렬한 매운 향은 없었다. 지인도 나처럼 매운 청양고추보다 맵지 않은 고추를 선호하는 듯했다. 일단 안심이 되었다. 좋은 뜻으로 준 농산물을 먹지도 못하고 버린다는 것은 참 마음 아픈 일이다. 모양도 크고 긴 고추가 대부분이었다.
가장 통통해 보이는 놈으로 골라 반으로 쪼개었다. 아삭이고추라고는 하지만 고추라는 특징은 가지고 있는 바, 고추 안에 숨겨진 매운 향이 금방 코 끝에 닿았다. 고추씨도 하얀 빛깔을 띠고 있었다. 금방 따서 가지고 온 것이 틀림없었다. 언젠가 본 영상에서, 고추를 수확하자마자 신선하고 깨끗하다는 강조하기 위해 농부가 고추 하나를 한 입 베어먹는 퍼포먼스를 하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청양고추가 아니라면 나도 언젠가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 고추는 좀 애매했다. 왠지 그냥 먹기에는 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반에 놓인 라면을 하나 집어 들었다. 때마침 12시가 갓 지난 시간이었다. 도마 위에 꼭지를 딴 고추를 올려 놓았다. 잘 갈아 놓은 칼로 끄트머리부터 순식간에 썰어 나갔다. 크기가 제법 크다 보니 고추 하나를 썰었는데도 한 주먹 가득했다. 콩나물을 넣고 계란을 풀고 마지막에 녹색빛이 도는 고추까지 얹었더니 그럴싸한 색의 조합이 연출되었다. 쫄깃쫄깃한 면발로 먹고 싶어서 1분이 지나자마자 불을 껐다.
이윽고 냄비 뚜껑을 열자 고추의 색이 더욱 선명해 보였다. 아삭이고추답게 강렬한 매운맛은 아니었다. 라면 한 젓가락에 콩나물 계란 흰자와 고추 하나를 얹으니 정말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그동안 대파는 여러 번 넣어 보기도 했지만, 고추를 라면에 넣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고추에도 좋은 성분들이 있다고 했는데 이 생각을 왜 하지 못했는지 괜히 아쉬웠다. 깔깔함을 추구하기 위해 고춧가루 약간을 넣어도 괜찮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비록 라면 하나임에도 휠씬 고급스러움이 느껴졌다. 크게 맵지 않아 그런지 고추씨를 먹어도 목넘김에도 큰 문제가 없었다. 라면 한 젓가락, 한 젓가락에 지인의 고마움이 듬뿍 담겼다. 곧 포만감이 밀려왔다. 남은 고추들은 냉장고 안에 잘 넣었다. 다음엔 고추로 어떤 요리를 할까 생각해봐야겠다. 나중에 지인을 만나면 고마운 마음을 다시 한번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아야겠다.
글 / 사외독자 한상대 님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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