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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일상다반사

[에피소드] 노각

by 앰코인스토리.. 2025. 8. 18.

사진출처 : 크라우드픽

철 지난 밭에서 가끔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다. 길게 줄기를 뻗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던 오이며 호박이며 가는 길을 멈추고 잎이 노랗게 변해 갈 때, 수많은 풀들 사이로 여름 내내 햇볕과 달빛을 받으며 자라났던 호박이나 오이가 남아있기 마련이다.

 

막 자라나는 풋풋하고 신선한 오이와 다르게 파란색은 온데간데없고 노랗게 온몸을 감싸 안은 모습은 수만 년 세월이 쌓여 노란 황금이 만들어진 것처럼, 모든 것이 한꺼번에 농축된 느낌마저 든다. 보통 오이의 두세 배 크기와 굵기는 여름을 오롯이 받아낸 위엄과 자태가 느껴진다. 늙은 오이, 즉 노각 하나만으로도 한 끼 밥상은 충분히 풍족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노각을 두 팔로 안고 집으로 향하는 길은 개선장군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큰 일이라도 해낸 것처럼 어깨가 으쓱거리고 입가에 머금은 미소는, 노각을 보이는 누구에게나 칭찬을 받을 것만 같았다. “엄마! 노각 하나 따왔어요.”하면 엄마는 “저녁 반찬을 뭐할까 걱정이었는데 참 다행이네.” 하셨다. 그리곤 노각을 흐르는 물에 몇 번 재빠르게 씻고 커다란 부엌칼로 석석 썰어내셨다. 오래된 오이이다 보니 껍질이 두꺼워 큰 칼로 꾹 밀고 내려가야 한다. 점점 드러나는 속살은 보통 오이의 그것과 비슷한 색이었다. 오이 특유의 풋풋한 냄새도 그대로였다. 여린 씨를 발라내고 길쭉길쭉하게 채를 썰고 나서 소금에 절이면 일단은 1차 작업은 끝이 난다.

 

가끔씩 전통시장을 걸을 때 노각을 보는 경우가 있다. 노란색을 입은 노각 그대로 팔기도 하지만 손질해서 투명 봉지에 담아 가격표를 붙이고 테이블에 올려 놓기도 한다. 손질을 해야 하는 수고를 덜게 해주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을 담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물로 헹구고 나서 노각을 있는 힘껏 짜냈다. 오이는 물기를 많이 머금어서 최대한 물기를 제거해야 양념이 잘 밴다고 하셨다. 마지막 식초까지 몇 방울 떨어뜨리면 무침은 완성되고, 밥상 위에 올라가기까지 참기 어려워 한 입만 달라고 보채기도 했었다. 겉절이는 바로 무치고 즉석에 먹어보는 맛이 일품이듯, 만들어진 반찬을 바로 먹는다는 것은 작은 행복이었다. 음식의 감별사인 것처럼 눈을 지그시 감고 음미하면 별 다섯 개를 내밀지 않을 수 없었다.

 

밥상이 안방으로 들어가고 가족들이 밥상에 둘러 앉아 오늘은 어떤 특별한 음식이 올라왔을까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밥상을 응시했을 때, 노각무침으로 모두의 눈이 모였다. 새콤한 향에 이끌려 한 젓가락씩 노각을 가져갔다. 한 접시 가득했던 노각은 게눈 감추듯 사라졌다. 이어 콩나물 무침도 함께 올리고 고추장을 약간 얹으면 맛깔나는 비빔밥이 완성되었다. 굳이 이름을 붙이고자 한다면 ‘노각무침 비빔밥’이라고나 할까? 몇 가지 재료는 아니지만 콩나물과 노각의 아삭거림이 참 좋았다.

 

식재료로 쓰이는 채소들은 오래되거나 철을 지나면 사용하기 어렵다. 뻣뻣해지거나 질겨져 먹기가 불편하다. 그래서 처음 나올 때 야들야들하고 부드러울 때 선호한다. 하지만 오이만은 그 와중에서도 꽤 늦은 시기까지 밥상에 오른다. 이만큼 참 고마운 채소인 것이다. 영양과 세월을 한껏 품은 노각을 한 젓가락 뜨면서 오늘 밥상에서 행복함을 다시금 만끽해 보려 한다.

 

글 / 사외독자 한상대 님 (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