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뜨거운 태양을 피해 여름의 휴가를 보내고 나면 아쉬운 마음 속에 담아온 풍경이 문득 떠오를 겁니다. ‘그라베(Grave)’는 이탈리아어로 장엄하게, 장중하게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대부분 그라베가 적힌 음악은 거대하거나 무겁거나 어딘가 눌려 있는 상황들을 연주할 때 사용되는 표기입니다.
헨델의 <사라방드>를 들어보면 근엄하고 장중한 거대한 산의 배경음악으로 사용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그라베의 뜻에 잘 어울리는 음악입니다. 눈 앞에 놓인 거대한 산에 압도되는 경험을 <사라방드>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사라방드>는 스페인 춤곡을 뜻하지만 헨델은 이러한 춤곡을 고귀하고 진지하면도 장엄하게 연주하도록 작곡했습니다.
헨델 모음곡 D단조 HWV 437 사라방드
Handel, Sarabande from Suite in D minor, HWV 437
영상출처 : youtube.com/watch?v=Veog9lA_3Zo
여름 한낮에 갑작스레 쏟아지는 소나기는 시원함을 넘어서 청량함을 선사합니다. 촘촘히 내리는 빗줄기가 따갑게 내리쬐던 햇살을 커튼처럼 막아주면 눅눅하던 녹음이 상큼한 초록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 인생도 힘들어서 축 처져 있다가 “사랑해!”라는 말 한 마디로 다시 힘을 내는 것 같이, 8월의 소나기는 하늘이 자연을 향해 힘을 내라고 하는 구애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랑을 고백하는 음악을 ‘세레나데(Serenade)’라고 합니다. 드보르작의 <세레나데>는 자연을 향한 하늘의 사랑고백으로 알맞은 곡입니다.
드보르작, 현을 위한 세레나데
Dvořák, Serenade for Strings in E Major, Op. 22
영상출처 : youtu.be/7Q6WQVV1GxQ
한여름 밤의 더위는 청량함을 그리워하게 하고, 그 그리움은 진하고 강렬했던 여름의 기억을 꺼내어 줍니다. 드뷔시의 달빛은 이러한 그리움을 잔잔히 마음 속에 떠오르게 하는 음악입니다. 그라베의 숨은 뜻이 ‘진지함’입니다. 진지함의 뜻은 ‘참되고 착실하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곳에 있고 다름이 없다는 것으로, 달빛이 느긋하게 한밤중에 항상 그곳에 떠올라 있는 것과 맞닿아 있습니다. 즉, 그라베는 장엄하지만 허세를 드러내지 않는 진중함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드뷔시,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중 달빛
Debussy, Clair de Lune
영상출처 : youtu.be/ACIbghK0JJQ?si=498LaAp_Sr2EWOkg
파도가 부서지는 시원함과 느긋한 마음으로 뜨거운 햇살을 받고자 했던 지난 휴가를 돌아보면서 비우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오히려 더 번잡하게 휴식을 써버린 것 같아 아쉽습니다. 쓰레기 같은 후회들을 바닷가에 훌훌 털어버리고 돌아오고자 했지만, 정작 남은 것은 지불해야 하는 명세서와 그을린 팔뚝입니다. 책 한 권 손에 쥐고 시원한 그늘에 앉아 망중한을 계획하지 못한 일정이 후회스럽습니다.
다음 여름은 북카페를 찾아 책 두 권으로 귀중한 휴가를 보내야겠습니다. 책 읽기에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을 추천합니다. 첼로라는 한 가지 악기로 세상의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기에 책 속의 세상과 조우하기에는 알맞습니다.
바흐, G장조 첼로 모음곡 1번
BWV 1007 Bach Suite No. 1 I. Prelude
영상출처 : youtu.be/bhV3nIOdaRA?si=kIC8VDz-i0p9gH9e
그라베라는 음악의 표현이 잘 어울리는 곡 중 하나를 소개하라면,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 서곡을 자신있게 추천합니다. 탄호이저라는 독일 음유시인의 전설을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 오페라로, 특히 서곡은 예술가의 고뇌와 갈등, 그리고 종교적 구원이라는 주제를 깊이 다루고 있습니다. 작곡가 바그너 자신의 이야기를 탄호이저에게 빗대어 음악을 풀어가는 방법으로 자신만의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소망이 진하게 배어있는 작품입니다.
리하르트 바그너, 오페라 탄호이저 서곡
Wagner, Opera Tannhäuser Overture
영상출처 : youtu.be/4QBeLJYmYkE?si=GLPTl3NAFaiip3ZS
푸르다 지쳐서 녹아 흐르는 여름의 숲은 시원한 시냇물 줄기에 더위를 식히고 우리는 강렬한 여름 햇살을 피하는 어수룩한 그늘에서 책 한 권과 함께 단풍과 황금색 들판의 가을을 기다립니다. 잊혀질 8월의 여름은 지나온 가을을 기억 속에서 꺼내줄 것이고 기억 속에서 얼굴을 내미는 가을은 곧 우리 앞에 그라베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는 헐떡이던 여름을 깊은 우물 속 같은 저음으로 진정시키고 달래는 듯이 연주해 우리를 가을로 차츰 안내합니다.
사무엘 바버, 현을 위한 아다지오
Barber, Adagio for Strings
영상출처 : youtu.be/Hc8gYoXkLZ4?si=9yH3e25qVFRKu9su
잠시 시간이 지나 가을이 오면 가을 문턱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이에게 더위를 피해 오느라 수고했다고 토닥이며 한아름 안아주고 싶습니다. 가을은 단어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계절입니다.
※ 사진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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