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반의 미국은 모순으로 가득 찬 장소였습니다. 영국의 식민지 시기를 거쳐 남북전쟁으로 연방 체제를 완성하고 나자, 19세기 후반부터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을 했지요. 20세기에 들어서 유럽이 양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미국 사람들은 각종 경영기법을 발달시키고 자본주의를 공고히 해나갔습니다. 오늘날 ‘경영관리’나 ‘산업공학’이라고 부르는 분야도 이 시기 미국에서 태동했습니다. ‘테일러주의’라 불리는 ‘과학적 관리법’도 이때의 유물입니다.
과학적 관리법은 작업장에서의 분업과 작업별 동작, 그에 소모되는 시간 등을 연구해 전체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방법입니다. 기계가 아닌 사람의 심리와 행동을 무시한 채 지나친 효율만 강조했다고 비판을 받지만, 현대 자본주의 경영관리의 토대가 된 것만은 사실이지요. 20세기 초 과학적 관리법을 신봉했던 엔지니어 중에는 프랭크 길브레스(1868~1924, Frank Bunker Gilbreth)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두가 딱딱하고 길었지요?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은 프랭크 길브레스가 아니라, 그의 아내인 릴리언 길브레스(1878~1972, Lillian Evelyn Gilbreth)입니다. 릴리언은 열두 아이를 키워낸 어머니였고, 훌륭한 산업공학 엔지니어이자 경영심리학자였습니다. 낡은 가치관과 새로운 기대가 충돌했던 20세기 미국으로 릴리언을 만나러 가보겠습니다.
캘리포니아의 명석한 소녀
사진 출처 : http://goo.gl/kmFLz
릴리언 길브레스는 1878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아홉 명의 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꽤 부유했다고 합니다. 설탕정제업을 하는 아버지의 수입이 아홉 명의 자녀를 키우기에 충분했던 것이지요. 어릴 때부터 여러 방면에서 공부를 잘했던 릴리언이었지만, 그녀의 부모들은 대학까지 가르칠 마음은 없었습니다. 여자는 좋은 남자를 만나 안정된 결혼생활을 꾸리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여기던 시대의 사람들이었으니까요. 릴리언은 자신 같은 평범한 여자에게는 남자들이 청혼하지 않아 일찍 결혼하기 힘들 것이라는 말로 부모를 설득했습니다. 부모의 보수적 가치관을 역이용한 셈이지요.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릴리언은 심리학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대학교에서도 릴리언의 성적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사실이 그녀를 번번이 좌절시키곤 했습니다. 캘리포니아대 졸업식에서 연설한 최초의 여학생이 되었는데도 말이지요. 대학을 졸업하고 찾아간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서는 영문학 담당 교수가 여성을 제자로 받지 않는다고 하는 바람에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꿔 석사 과정을 밟아야 했습니다. 그 후 영문학 전공, 심리학 부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거머쥐었습니다.
사진 출처 : https://goo.gl/hbmd9B
릴리언의 삶에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남편 프랭크 길브레스를 만난 것은 1903년의 일입니다. 프랭크는 릴리언과 달리,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학업을 포기하고 건설 현장에 나가야 했지요.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던 프랭크는 벽돌 쌓기 공정을 연구했습니다. 작업자의 열여덟 가지 동작을 다섯 가지로 줄여 생산성을 크게 높이면서 프랭크의 ‘동작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릴리언은 열 살 연상인 남편과 편지로 교류를 해나가다가 1904년 결혼을 했고, 자신이 나고 자란 캘리포니아의 반대편인 동부에 정착하게 됩니다. 릴리언과 프랭크는 많은 아이를 낳길 원했습니다. 그들의 소원대로 부부 사이에는 한 다스, 총 열두 명의 아이가 태어납니다. 동작 연구를 통해 건설업 분야에서 경영 컨설팅을 하던 프랭크는 릴리언에게 경영심리를 전공하라고 권했습니다. 릴리언은 아이들을 낳고 키우는 와중에 공부를 계속하고 여섯 번째 아이를 낳기 사흘 전에 응용관리 박사 학위를 받게 되지요.
시끌벅적한 가족의 삶
길브레스 집안에 태어난 열두 명의 자녀는 괴짜 엔지니어 아버지와 현명한 심리학자 어머니 사이에서 동화 같은 유년 시절을 보냅니다. 이 시기의 이야기는 딸 어니스틴과 아들 프랭크 주니어가 쓴 책 「한 다스라야 더 싸다(Cheaper by the Dozen)」에 담겨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어 속편도 나왔고 영화, 오페라, 연극으로 제작되었습니다.(한국에서도 여러 번 번역되어 다양한 제목으로 출판되었지만 2015년 현재는 모두 절판되었습니다.) 자녀들은 자신들의 집이 ‘과학적 관리법과 낭비의 동작을 없애는 학교’였다고 회상합니다. 비인간적으로 들리나요? 하지만 아이들의 아버지 프랭크는 유머러스한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릴리언의 다정함이 아이들을 지켜주었습니다.
길브레스 가족의 생활을 몇 장면 살펴볼까요? “아빠는 우리가 설거지하는 장면을 영화로 찍어 보여주면서 불필요한 행동을 줄이면 일을 더 빨리 마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가외의 용돈이 필요한 아이들은 자기가 그 일(베란다 페인트칠하기, 앞마당 나무 그루터기 없애기 등의 집안일)을 해야 하는 이유와 입찰 가격을 종이에 적어 제출한다.”, “욕실에는 각자가 해야 할 일의 목록이 비치되어 있었다.”, “그는 조끼를 입을 때 아래에서 위로 단추를 채우면 3초가 걸리는 반면 위에서 시작하면 7초가 걸린다며 항상 밑에서부터 채웠다.” 유쾌한 소동들이 궁금하다면 헌책방에서라도 책을 직접 확인하세요.
남편과 함께 경영관리와 자녀양육을 병행하던 릴리언의 인생에 다시 한 번 전기가 찾아옵니다. 1924년 릴리언이 아직 마흔여섯 살이고 아이들이 한창 자라고 있을 때, 남편 프랭크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부부는 아이들이 열 명이었을 때부터 프랭크의 심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릴리언은 열 명이든 열두 명이든 자신의 수고로움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해 계획대로 한 다스의 아이들을 낳았습니다. 언젠가 닥치리라 예상했던 죽음이지만 릴리언과 아이들의 슬픔은 적지 않았지요. 프랭크의 신기한 자녀 교육은 자신이 없을 때 아이들이 릴리언을 도울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인간을 생각한 산업공학의 선구자
사진 출처 : http://goo.gl/KGC349
릴리언은 어머니로서 연구자로서 프랭크의 자리를 빠르게 메웠습니다. 프랭크가 발표하기로 되어 있던 학회에 대신 참석하는 것을 시작으로 왕성한 사회 활동을 벌였습니다. 이미 남편과 공저한 「동작연구(Motion Study, 1911)」와 단독 저술인 「경영심리학(The Psychology of Management, 1914)」이라는 책으로 경영 분야에서 인정받고 있었지요. 릴리언은 남편의 컨설팅 회사 경영도 이어갔고, 산업공학 분야 최초의 여성 교수가 됩니다.
생전에 프랭크 길브레스는 ‘유일한 최선의 작업방법(the one best way of doing work)’을 고민했습니다. 쓸모없는 동작을 없애서 빠르게 작업을 끝내자는 것이 그의 목표였습니다. 이러한 방법은 효율성만 강조하다 작업자의 심신이 어떤지는 살피지 못할 우려가 있었습니다. 이 점을 보완하여 인간적인 경영관리와 산업공학 연구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릴리언의 역할이었지요. 릴리언은 심리학자, 교육자, 엔지니어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도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릴리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발로 페달을 밟으면 뚜껑이 열리는 쓰레기통을 사용해 보신 적이 있나요? 직장과 가정에서 여성들의 생활에 관심이 많았던 릴리언 길브레스가 개발한 것입니다. 릴리언은 여성의 몸에 무리가 덜 가는 싱크대의 적절한 높이를 계산하기도 했지요.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장애를 입은 사람들에게도 관심이 많아 비장애인과 같은 생활을 하도록 돕는 장치와 공간 배치에도 이바지했습니다. 아흔 살이 넘도록 릴리언은 저술과 강의, 연구를 계속하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진 출처 : http://goo.gl/aszHCl
릴리언의 남편 프랭크에게 무엇 때문에 시간 절약을 그토록 원하느냐고, 남는 시간에 무엇을 할 작정이냐고 누군가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교육을 위해서, 아름다움을 위해서, 예술을 위해서, 즐거움을 위해서죠.” 효율성을 높여 생산성을 늘리자는 구호는 많은 것을 잊게 합니다. 인간이 생산성의 도구가 아니라, 생산성이 인간다운 삶의 수단인데 말이지요. 산업공학의 부모인 릴리언과 프랭크 부부는 그 점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참고한 글
「역사 속 여성 엔지니어를 찾아서」 송성수 (부산대학교 물리교육과 교수), 「아빠 고생하신 거 우리 다 알아요」 프랭크 길브레스 주니어, 어니스틴 길브레스 커레이 지음, 장석영 옮김, 현실과 미래.
글쓴이 김희연은_사보와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자유기고가다. 자기 과시에 지나지 않는 착한 글이나 빤한 이야기를 피하려고 노력하며 쓰고 있다. 경력에 비해 부족한 솜씨가 부끄럽고, 읽어주는 독자에게는 감사하며 산다.
※ 외부필자에 의해 작성된 기고문의 내용은 앰코인스토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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