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상상하는
그 휴가
덥고 지칠 때면 마음 속으로 근사한 휴가를 상상합니다. 언젠가는 저 푸르고 투명한 몰디브 앞바다에서 가오리와 함께 수영을 해보리라, 언젠가는 흰 눈으로 뒤덮인 노르웨이의 산장에서 초록빛으로 물드는 오로라를 만나리라, 언젠가는 제주도의 조용한 돌집에 머물면서 하염없이 삼나무 길을 걸어보리라, 언젠가는 2박 3일 동안 부족함 없는 호텔에 처박혀 아무것도 안 하고 뒹굴거리리라....
하지만 막상 휴가를 가게 되면 마음이 그렇게 바쁠 수가 없습니다. 가고 싶었던 여행지와 식당과 카페들을 줄줄이 리스트업하느라 떠나기 전부터 참으로 부산합니다. 입을 옷은 언제나 부족하니 휴가를 핑계로 쇼핑에 몰두합니다. 올해의 티셔츠, 올해의 수영복, 올해의 샌들, 올해의 선글라스가 필요하니까요. 휴가를 가기 전부터 백화점과 온라인 면세점을 들락거리느라 바쁩니다. 해외여행이라도 떠난다면 핸드폰과 좀 멀어져도 좋으련만 어떻게든 일과 사람에 연결되어 있으려고 가장 싸고 빠른 유심을 주문합니다. 그뿐인가요. 혹시 급한 일이 생길지 모르니 노트북도 가져가야 하고, 다이어리도 넣어야지요. 혼자 가는 여행이 아니라면 같이 가는 사람 수만큼 챙길 거리가 늘어납니다.
여행을 가서도 만만치 않습니다. 가고 싶었던 곳을 다 둘러보기 위해 30분 단위로 짜둔 스케줄을 따라 열심히 돌아다닙니다. 카페에 앉아서 잠깐 쉴까 싶지만, 쉬는 동안 스마트폰을 부여잡고 다음 여행지를 검색하거나, SNS를 뒤적이거나, 링크를 누르고 또 누르며 끊임없이 정보를 찾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아이들과 함께 가는 휴가라면 무엇을 먹을지, 어디로 갈지, 더욱 신경 쓸 일이 많아집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휴가라는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진짜로 진정한 휴식은 가능할까요? 아무 걱정 없이 오롯이 나만을 위한 휴가라는 게 존재할까요? 만약에 어른에게도 방학이 있다면, 여러분은 어디로 떠나보시렵니까?
떠난다는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몽글몽글 기분이 좋아지지만, 당장 해결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훌쩍 떠날 수 없어서 참 아쉽습니다. 이러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한 책 두 권을 소개합니다. 적어도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마음의 짐을 살짝 내려놓으실 수 있을 겁니다. 읽는 내내 작가님과 함께 여행하는 기분이 드는 책들입니다.
어른에게도 방학이 있다면 와인이 시작된 곳으로
「유럽 와이너리 여행」
나보영 지음 | 노트앤노트
음식에 대한 글쓰기는 참 어렵습니다. ‘맛있다’와 ‘정말 맛있다’에서 벗어나지 않는 진부한 표현들을 재끼고 나면, 음식의 고유한 맛에 대한 표현을 찾기가 쉽지 않아요. 그런데 이 책은 챕터를 넘길 때마다 기분 좋은 놀라움이 펼쳐졌어요. 책에 나오는 수많은 와인과 와이너리를 어쩜 매번 신선하고 참신한 표현으로 소개하는지! 역시 국제와인기구(OIV)의 ‘아시아 와인 트로피’와 ‘월드 베스트 빈야드’의 심사위원으로 일하는 작가님은 다르구나 싶었습니다.
나보영 작가님의 필력은 ‘실크 드레스 자락처럼 매끄러운 질감이 화사하게 번지는’, ‘온몸에 묻어난 서늘함이 금세 입 안에서 상쾌함으로 바뀌는’ 와인의 섬세한 맛을 표현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촉촉하고 폭신한 포도밭의 흙이 발끝에서 느껴지고, 몇백 년 전에 지어진 지하 카브의 서늘한 기운에 소름이 돋고, 메디치 가문의 일원인 알베르토 메디치와의 만남에 살짝 긴장이 되고, ‘기분 좋게 혀를 마사지 해주는’ 와인의 옅은 탄산이 입안에서 번져가고, 괴테가 사랑했던 와인과 달리가 사랑했던 와인의 맛이 궁금해지고, 함께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의 청량한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단정하면서도 따뜻한 작가의 시선을 따라 같이 여행하는 기분이지요.
에세이처럼 스토리가 있어 술술 읽히면서, 와인과 와이너리에 대한 정보를 꾹꾹 눌러 담고, 와이너리를 어떻게 여행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도 꼼꼼하게 담아두었어요. 진정한 와인 러버라면 와인 냉장고 옆에 한 권 비치해 두고, 책 속의 와인들을 한 병씩 맛보며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와인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어도, 이 책을 읽으면 와이너리 여행에 대한 로망이 샘솟지 않을까 싶습니다. 유럽의 와이너리를 여행한다는 것은 미식, 예술, 건축,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을 알아가는 일이니까요.
뭐, 또 이렇게 거창하지 않더라도 「유럽 와이너리 여행」을 읽으며 와인 한 잔을 곁들이면 그야말로 남부럽지 않은 휴가가 될 것 같습니다. 이왕이면 수영장에 발을 담그고 읽으면 더욱 좋겠네요.
믿고 보는 박상영 작가의 글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
박상영 지음 | 인플루엔셜
‘수많은 여행 끝에 내가 도달한 결론은 하나다. 나는 결코 여행을 통해 휴식을 취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 심지어는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도.’
솔직해도 이렇게 솔직할 수 있다니요.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을 기대하며 책을 펼쳤는데, 고작 14페이지 만에 이런 고백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책은 분명 여행 에세이라고 했는데,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람이 쓴 여행 에세이가 아직 300페이지나 남아있었습니다. 대체 남아있는 300페이지에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궁금했습니다. ‘휴식이라는 행위에 어떤 완벽을 기한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휴식’과는 거리가 먼 개념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라는 작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요.
그런데 단 1%의 빈틈을 찾아 나선 작가가 풀어놓는 에피소드들이 기가 막힙니다. 왜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눈물을 흘리며 웃음을 터뜨리며 읽었는지 이해가 갑니다. 벨기에의 한 호텔 방에서 레이디 가가 뮤비를 보며 와플을 깨작거리던 밤, 변비를 맹장염으로 오인해 밤새 약을 먹으며 불안에 떨던 밤, 마사지 공으로 지네를 잡으며 기겁을 하던 밤을 생생하게 그려내어 박장대소를 하다가도, 함께 여행한 사람들에 대해 찬란한 경외감을 갖게 하는, 옆 사람의 작고 사소한 사랑스러움마저도 깨알같이 포착하는 작가의 시선에 연달아 감탄하게 됩니다.
이금희 아나운서가 ‘키득거리다가 눈시울 뜨뜻해지다가’하며 이 책을 읽은 이유를, 배우 봉태규가 ‘책을 읽었을 뿐인데 이토록 기분 좋은 여독이 오다니’라고 말한 이유를 읽다 보면 알 것 같습니다. 봉태규는 ‘박상영과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주저 없이 따라나설 것’이라고 했는데요, 앞으로 박상영이 쓰는 여행 에세이라면 주저 없이 읽을 것 같습니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고백한 소설가의 여행 에세이가 이렇게 재미있어도 되는 걸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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