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이들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당신,
당신에겐 차별이 보이나요?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김지혜 작가는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을 이야기합니다. 주인공 장그래가 회사에서 설 명절 선물을 받은 장면이지요. 선물로 식용유 세트를 받았으니 기분이 좋아야 할 텐데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다른 직원의 자리에는 햄 세트가 놓여 있었거든요. 회사에서 비정규직에게는 식용유 세트를, 정규직에게는 햄 세트를 주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선물을 받았다는 기쁨보다 차별을 받았다는 설움이 앞서는 그 장면에서 우리는 묘한 감정을 느낍니다.
김지혜 작가는 자신이 겪은 차별 하나를 떠올립니다.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던 자신의 방에는 보라색 종이를 코팅한 문패가, 정규직 직원 사무실에는 나무판에 흰색 글씨로 명패가 붙어있었습니다. 2년 반쯤 지나서 정규직 동료에게 이 차이를 이야기했더니, 그는 명패가 다르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더랍니다. 누군가에게는 보이지 않는 사소한 차이가 당사자에게는 문을 열고 닫는 매 순간 주홍글씨 같았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는 것이지요.
몇몇 기업에서는 사원증의 줄 색깔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구분해 논란이 되었지요. 물론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는 기업도 있지만, 많은 기업에서 사원증이나 임시출입증 등으로 다른 신분증을 제공하곤 합니다. 식용유 세트와 햄 세트의 경우라면 비용 절감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사원증 줄 색깔에는 아무런 비용 차이도 없습니다. 재정적 이유가 없을 때에도 사람들은 구분을 목적으로 한 구분을 합니다.
차별은 거의 언제나 그렇습니다.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있는데, 막상 차별을 하는 사람은 없어 보입니다. 자신에게 ‘나는 차별주의자인가?’물었을 때 ’그렇다‘고 답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당연히 자신은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선량한 차별주의자」와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 이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아니었는지, 남들의 고통에 공감한다고 착각하며 차별을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해 온 건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아요.
차별을 당할 때가 있으면 할 때도 있지 않을까?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지음 | 창비
뉴욕의 한 맥도널드 매장에서 한인 노인들을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여럿이 1~2달러짜리 커피나 감자튀김을 주문하고 너무 오래 앉아있다는 이유로 말이지요. 필라델피아의 스타벅스 매장에서는 흑인 청년 두 명을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음료를 주문하지 않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두 사건 모두 인종차별이라고 크게 비난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부산의 한 사우나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P 씨의 입장을 거부했고, 그를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경찰은 P 씨에게 다른 사우나로 가라고 안내하며 주인이 거부하면 어쩔 수 없다고 했습니다.
부산의 사우나에서 주장한 ‘내국인 전용’이라는 말은 흑백분리 시대의 ’백인 전용‘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카페나 식당에서 볼 수 있는 ‘노키즈존’이나 ‘노스쿨존’, ‘노장애인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손님이 예의를 지키지 않을 수 있다는 이유로 특정 ‘집단’을 거부해도 괜찮은 것일까요? 만약 진상 손님이 성인 남성이라면 ‘성인남성 금지’라는 표지판을 내세울 수 있을까요? 진상 손님이 인근의 대기업 직원이라면 ‘○○기업 금지’라며 사원들의 입장을 거부할 수 있을까요?
불평등과 차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학자들은 평범한 사람의 특권을 발견합니다. 일상적으로 누리고 있는 이런 특권은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얻은 게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조건이기 때문에 눈치채기 어렵지요. 이 책에서는 굉장히 다양한 사례를 들어 다양한 각도의 차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결정장애가 있다’는 표현이 왜 문제가 되는지, ‘다문화’라는 말이 어떨 때 소외감을 불러오는지, 고정관념이나 구조적 차별은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지, 평범한 일상 속에서 우리가 누리는 특권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차별시키는지, 진정한 평등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농인의 자녀인 코다의 시선으로 본 세상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
이길보라 지음 | 창비
17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 보스턴 남부의 한 섬마을에는 유전적으로 청각장애인이 많았다고 합니다. 19세기 미국 전체 인구의 청각장애인 비율과 비교하면 100배나 높았다고 해요. 비장애인의 생각으로는 그런 생활이 힘들 것 같지만 섬 사람들은 들리지 않는 걸 장애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청각장애는 평범한 일이었기에 모두가 장애 유무와 상관없이 제2언어로 수어를 배웠다고 해요. 한 노인은 수어를 하는 농인들은 사람마다 목소리가 다른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회고했습니다.
의료인류학자인 노라 엘렌 그로스는 섬에서 살았던 노인을 찾아가 농인 이사야와 다비드를 기억하는지 묻습니다. 노인은 그들이 훌륭한 어부였다고 대답합니다. 농인이 아니었냐고 물으니, 그는 기억을 더듬으며 대답합니다.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다고,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고 말입니다. 그 섬에서는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장애나 결여, 손상의 의미가 아닌 그저 하나의 다름일 뿐이었습니다.
농인 부모 사이에서 자란 영화감독이자 작가인 이길보라는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에서 지겨울 정도로 들은 질문을 떠올립니다. “농인의 자녀로서 힘든 점은 없었나요?”라는 질문입니다. 부모에게서 수화언어를 배우고 세상으로부터 음성언어를 배워 두 사회를 매개할 수 있었다는 긍정적 경험을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꼭 어려운 일이나 힘든 일에 대해 묻습니다. 당연히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 장애를 가진 몸으로 사는 것과 그의 자녀로 사는 일은 쉽지 않았겠지요. 모두의 인생이 그렇듯 기쁠 때도 있고 속상할 때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어려웠던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흘리거나 쯧쯧 혀를 차지요. 그 순간 작가는 자신과 부모의 삶이 대상화되는 경험을 합니다. 그저 불쌍하기만 한 건 아닌데 불쌍한 사람이 됩니다.
고통에 공감한다는 말, 희망을 가지라는 말에는 고통은 불행한 일이라는 전제가 담겨 있습니다. 이길보라 작가는 장애는 다름이자 상실이자 고통이지만 그 고통이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고, 고통의 가치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고통에 공감한다는 단순하고 납작한 착각을 넘어설 때 비로소 더 넓고 깊은 세계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타인의 삶을 동정하거나 연민하지 않는 진정한 공감의 언어를 탐구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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