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젤은 우리가 거리에서 거의 매일 보다시피 하는 이름. 디젤 엔진을 적용한 차는 ‘디젤 차량’, 여기에 넣는 연료를 ‘디젤유’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디젤 엔진은 개발자인 루돌프 디젤의 이름을 가리키는데요. 루돌프 디젤은 현대 엔지니어들의 시조이고, 그의 삶과 죽음에는 오늘날 엔지니어들이 겪는 문제들이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 생전에 세상의 주목을 받은 엔지니어이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루돌프 디젤을 소개합니다.
똑똑한 공대생, 내연기관에 관심을 기울이다
사진 출처 : http://www.dieselduck.info
루돌프 디젤(Rudolf Christian Karl Diesel, 1858-1913)이 태어난 1858년은 독일이 아직 통일 제국이 되기 전이었습니다. 디젤의 부모인 테오도어 디젤과 엘리제 디젤은 독일의 바이에른 왕국 출신이었으나 프랑스 파리에서 만나 결혼했지요. 아들 루돌프도 파리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일어나면서 이들 가족은 파리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바이에른이 프랑스의 적국 프로이센과 손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이긴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1871년 독일제국이 성립됩니다. 루돌프는 부모의 고향인 바이에른 주 아우크스부르크에 정착하게 됩니다.
혼란한 근대 유럽에서 태어난 루돌프 디젤은,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았고 기계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자신의 관심사대로 아우크스부르크 공업학교를 나와 뮌헨 공과대학에 진학합니다. 바이에른 주에 아직도 건재한 뮌헨 공과대학은 현재까지 열 명이 넘는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 공과대학에서 디젤은 카를 폰 린데의 열역학 수업을 들으며 그의 제자가 됩니다. 린데는 암모니아를 냉매로 해서 최초의 냉장 기술을 발명한 사람이지요. 디젤은 학교를 마치고 조교생활을 하다가 전공을 살려 냉동회사에 다닙니다.
효율성 높은 내연기관은 학창시절부터 디젤의 주요 관심사였고, 1897년 만 39세의 디젤은 아이디어를 떠올린 지 14년 만에 디젤 기관을 발명합니다. 이 디젤 기관이 오늘날까지 여러 곳에 쓰이고 있는 것이지요. 루돌프 디젤 이후에 소음과 분진을 제거하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디젤 기관은 디젤보다 오래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기술자는 경영자가 될 수 없을까?
사진 출처 : http://www.dieselduck.info
루돌프 디젤이 디젤 기관 발명에 성공하기까지는 1890년경 설계가 어느 정도 구체화한 뒤에도 7년여의 세월이 더 필요했습니다. 그 사이 디젤은 마르타 플라세라는 여성과 결혼을 했고, 스승 린네의 영향을 받아 암모니아 가스 엔진을 개발하려고 했습니다. 연구가 지지부진하던 중,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개발 방향을 바꿔 1893년에는 ‘합리적인 열기관의 이론과 구조’라는 설계 방식에 특허를 냅니다. 이것이 디젤 엔진의 첫걸음입니다. 루돌프 디젤은 설계 변경과 기관 개조를 하며 4년을 더 고생해야 했습니다. 당시 휘발유와 증기 기관도 나와 있었지만, 불을 붙여 시동을 거는 가솔린 엔진은 위험성이 높았지요. 실린더 안의 공기를 고온고압 상태로 만들어 거기에 액체 연료를 분사해 불꽃을 내는 디젤 엔진은 안전하기도 했고, 연료 효율도 가솔린 엔진보다 빼어났습니다.
사진 출처 : http://goo.gl/awlHKQ
디젤 기관을 설계한 엔지니어가 루돌프였다면, 기술을 적용한 테크니션은 아우크스부르크 기계제작소의 감독 하인리히 폰 부츠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만든 고효율의 디젤 엔진이 발표되자 관련한 모든 회사가 이것을 원했습니다. 루돌프 디젤은 투명한 얼음을 얼리는 제빙기 개발로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었고, 여기에 디젤 엔진의 특허 사용료를 받아 부까지 쌓을 수 있었지요. 이때 아우크스부르크 기계 제작소는 디젤 엔진의 독점 판매권을 원했는데, 디젤은 이에 반대해 자신의 기술을 공개했습니다. 독점은 기술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이유에서 말이지요.
안타깝지만 디젤의 판단은 틀렸던 것 같습니다. 설계를 조금만 변경해 특허를 주장하는 사람과 기업들이 늘어났고, 가솔린과 증기 엔진을 개발하던 무리에게도 시샘을 받았으니까요. 부와 명예를 얻었던 엔지니어 루돌프 디젤은 결국 우울증까지 얻게 됩니다. 이 대목에서, 비슷한 상황에 처해 비밀리에 비행을 하며 특허 분쟁에 말려들었던 라이트 형제가 겹쳐집니다. 이처럼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엔지니어들은 오랜 연구개발 끝에 일약 스타가 되었다가 특허와 경영 분쟁으로 골치를 앓아야 하는 운명에 처하곤 했습니다.
드레스덴호에서 사라진 엔지니어
1913년 9월 29일 루돌프 디젤은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가는 우편선 드레스덴 호에서 도버 해협으로 몸을 던집니다. 그의 시신은 2주 후 북해에서 한 핀란드 어선에 발견되었고, 소지품을 건져 아버지가 확인했습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분명한데도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음모설이 무성했었습니다. 디젤이 능력 있고 유명한 엔지니어였기 때문입니다. 독일 비밀경찰이 영국에 엔진 공장을 세우려는 디젤을 암살했다는 설도 돌았습니다. 디젤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영국과 독일은 적국이었으며 독일의 주력 잠수한 U보트가 디젤 엔진을 적용했기에 이 설은 그럴듯하게 들렸습니다.
사진 출처 : http://goo.gl/EiHm3Q
개발자인 루돌프 디젤은 다소 허망하게 사라졌지만, 디젤 엔진은 그가 떠난 지 100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고효율 엔진으로 여러 운송 수단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디젤의 시대가 이미 암시하고 있던 것처럼, 이제 과학자나 기술자가 개인의 이름으로 성취를 내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과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들도 공동 수상을 하며, 기술개발 분야 역시 많은 사람이 팀 단위로 움직입니다. 인간의 기술력이 그만큼 강해졌고 그 결과물도 혼자서 다룰 수 없을 만큼 거대해졌기 때문이겠지요. 루돌프 디젤은 산업 사회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잠시 낭만적인 엔지니어의 시대를 살다 갔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아이디어와 결과물 사이에는 묵묵하게 열정을 퍼부어야 하는 기나긴 시간이 가로놓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동영상 : diesel story 1952 documentary (18:10)
영상 출처 : 유튜브 (http://youtu.be/U7CxoJhjHR4)
글쓴이 김희연은_사보와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자유기고가다. 자기 과시에 지나지 않는 착한 글이나 빤한 이야기를 피하려고 노력하며 쓰고 있다. 경력에 비해 부족한 솜씨가 부끄럽고, 읽어주는 독자에게는 감사하며 산다.
※ 외부필자에 의해 작성된 기고문의 내용은 앰코인스토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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