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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일상다반사

[에피소드] 누이

by 앰코인스토리 - 2015. 1. 27.

 

 

대학 시절,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해석해주는 교수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개인주택을 강의실로 활용하셨는데, 학원보다 수강료가 저렴한 데다 유명한 영문학자여서 늦게 가면 앉을 자리가 없었다. 연세도 지극하여 교육 중에 깜박깜박 졸기도 하면서 처음 대하는 단어가 나오면 어감부터 음미하여 좋은 의미, 나쁜 의미일 것 같다면서 사전을 찾곤 하셨다.

 

하긴 어느 나라의 언어이건 단어의 어감이나 관습에 따라서 그 의미도 확연히 다르다. ‘아줌마’라고 하면 전철에서 빈자리를 향하여 몸을 날리거나 새치기의 대명사로 떠오르지만, ‘어머니’라는 단어는 부드러운 데다 생명을 잉태하고 지키려는 거룩한 희생자로 다가옴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누이’는 어떤 느낌일까? 아버지가 2대 독자였고 다섯 형제의 맏이로 태어났기에 억센 말과 거친 행동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인지 누나나 여동생이 있는 친구가 한없이 부러웠고 그들 사이의 부드럽고 다정다감한 정을 못 느끼며 자란 게 아쉬웠다.

 

생전의 어머님도 나이가 드시면서 ‘너희 중에 하나라도 딸이었다면 좋았을 텐데….’하던 간절함에 부응해드리지 못했음을, 여든이 넘은 장모님과 아내의 부쩍 많아진 전화통화를 보면서 용서를 구한다. 칠순이 눈앞인 나 역시 ‘늘어만 가는 아내의 잔소리를 누이에게 하소연한다면, 따뜻한 말로 위로해주지 않을까’라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1남 1녀를 두었지만 먹고 살기 바빠 그들을 눈여겨 볼 여유가 없었는데, 요사이는 다섯 살 된 손자와 겨우 말을 하는 손녀로부터 경험하지 못한 행동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즐긴다.

 

지난 토요일, 손녀의 두 돌을 축하해 주기 위해 패밀리 레스토랑을 찾았다. 안산호수공원행사에 참석하고 조금 늦게 예약된 룸에 들어서니, 손녀가 웃음 띤 얼굴로 다가오더니 안아달라는 손짓을 한다. 가슴에 안겨서는 두 손으로 목을 껴안고 발로는 허리를 감싸면서 뺨에 뽀뽀까지 하는 게 처음이라 어리둥절하다. 가끔 집에 온 녀석을 안거나 업어주려고 하면 부리나케 도망가던 터였다. 할아버지가 오면 선물을 준다고 며느리가 한 말을 기억한 모양이다.

 

우리가 하는 말은 어느 정도 알아듣지만 발음은 어눌해서 “아빠, 엄마”와 “아파, 시러”정도는 가능하지만, 오빠는 “오~”이고 고모도 “고~”이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할~”에서 끝나는 수준이다.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축하노래에서 자기 이름이 나오니 어깨를 들썩이면서 코 찡긋하며 웃음 짓는 게 매력덩어리다. 손자는 삶은 새우를 먹으면서 어디서 배운 신조어인지 “고래가 새우 먹는 맛이 바로 이 맛이야.”고 하여 모두를 웃음 짓게 했다.

 

두어 시간 동안 여덟 명이 모여 벌인 행사를 마치고 며느리가 수년 동안 갈고닦은 실력으로 우려내는 커피를 마실 겸 아들 집으로 갔다. 손녀는 조금 전에 받은 인형과 친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오빠가 로봇을 조립하기 위하여 펼쳐놓은 부품들을 한 손으로 쓸어버린다. 손자는 “왜 이래”하면서 눈물부터 쏟았다. 손녀는 할머니한테 “오~, 오~, 이잉”한다면서 손등으로 눈을 훔치는 시늉을 하면서 흉보기에 신이 났다. 다시 오빠 앞에 서 있다가 다 맞추어가는 로봇을 들고는 제 방으로 뒤뚱뒤뚱 도망가 버린다. 소리를 지르며 때릴 법도 한데 참아주는 게 오빠의 배려인가.

 

손자가 “정말, 왜 이러는 거야‘하면서 따라 들어가니, 손녀는 침대 위에서 “오~, 오~”하면서 로봇을 등 뒤로 감추기에 바쁘다. 한참이나 뺏고 빼앗느라고 실랑이를 벌이더니, 조금 전의 시샘과 짜증은 어디로 가고 부둥켜안고 뒹굴다가 오빠가 재미없어하니 이마에 고사리손을 얹고는 ”오~, 오~, 아~퍼“한다. 장난을 거는 것도 끝맺는 것도 손녀 몫이다.

 

어린 시절, 마당 한편에서 장난치는 강아지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느낌과 오버랩 된다. 밋밋하게 흘러가는 날들은 주가 되었고 주들은 달이 되었지만, 천진난만한 오누이의 모습을 보면서 늙은이는 활력을 얻는다.

 

글 / 사외독자 이종철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