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호모나랜스?
다양한 플랫폼으로 확장하는 이야기
인간의 뇌는 이야기를 좋아하도록 타고났다고 해요. 인간은 이야기를 전달하면서 생존 방법을 전수하고, 지식을 축적하며, 문화를 융성했어요. 문자가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이야기를 통해 정보를 해석하고 세상을 배워왔지요. 그래서 이야기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이기도 합니다.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는 목숨을 걸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천 일과 하룻밤을 버틴 후에 결국 자신의 목숨을 살리고, 왕의 인생을 되살리는 해피엔딩을 맞습니다. 이야기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기 때문이지요.
이야기꾼 호모나랜스의 세상
‘호모나랜스(Homonarrans)’는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영어의 ‘스토리텔러(storyteller)’와 비슷한 말이지요. 이 말은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의 영문학 교수인 존 닐(John D. Niles)이 1999년 「호모나랜스 Homo Narrans」라는 책을 출간하며 처음 사용했습니다. 존 닐 교수는 이 책에서 ‘인간은 이야기하려는 본능이 있고, 이야기를 통해 사회를 이해한다’고 말합니다.
최근에 호모나랜스는 디지털 공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생산하고, 공유하고, 전파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많이 쓰입니다. 보통 정보에 대한 사실적 전달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합니다. 주로 구매한 상품에 대해 디지털 공간에서 말하기 좋아하는 소비자를 일컫는 경우가 많아서 마케팅 분야의 용어로 알려졌지요. 하지만 일상의 모든 포커스가 디지털 공간으로 집중되는 요즈음에 마케팅 분야에서만 호모나랜스가 활약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호모나랜스는 수많은 분야로 확장해 나갑니다. 재미있게도 실험적인 작가들과 독자들이 문학 분야에서 호모나랜스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신선한 방식, 새로운 플랫폼
바쁜 일상 속에서 짧은 시간에 소비할 수 있는 이야기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이야기를 접하는 방식도 다양해졌습니다. 전자책 시장은 침체된 국내 출판계에서 꽤 호황을 누리는 중이고, 월 정액제로 콘텐츠를 이용할 수 있는 사이트도 늘어났어요. 덕분에 전자책 리더기도 다양하게 출시되어 편리하게 책을 읽기에도 좋아졌지요.
이제는 만화방에서 만화책을 뒤적거리는 일이 특별한 이벤트가 되었습니다. 짜장면이나 라면을 시켜 먹으며 만화책을 쌓아놓고 읽는 대신, 매일 원하는 시간에 알람을 맞춰놓고 손안의 스마트폰으로 좋아하는 작가의 웹툰을 보거나 연재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많아졌거든요. 동네의 도서대여점을 들락거리는 대신 카카오페이지나 시리즈, 조아라, 문피아 같은 앱을 깔아두고 이동시간 짬짬이 장르문학을 즐깁니다.
이런 시대의 흐름과 독자들의 변화에 발맞춰 독특한 형식과 신선한 내용으로 문단에 새바람을 몰고 온 작가들이 있습니다.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던 글을 모아 소설집으로 출판하기도 하고, 매일 저녁 이메일로 글을 배달해 주기도 합니다. 올 한 해를 마무리하기에 걸맞은 주목할 만한 이야기꾼과 마음을 뒤흔드는 참신한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일간 이슬아 수필집」
이슬아 지음, 헤엄출판사
이슬아 작가를 아시나요? 독자들은 ‘한국의 셰에라자드’라고, 출판계는 ‘헤엄 출판사의 대표’라고, 작가 스스로는 ‘연재 노동자’라고 지칭하는 이슬아 작가는 학자금 대출 2,500만 원을 갚기 위해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작가들은 출판사에서 책을 출판해야만 독자에게 작품을 선보일 수 있었습니다만, 이슬아 작가는 구독자를 SNS로 모집했습니다. 한 달치 구독료 1만 원을 내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밤에 새로운 글을 이메일로 전송해 주는 연재 프로젝트였지요. 독특한 플랫폼을 개척한 신선한 발상도, 매일매일 글을 짓는 작가의 성실함도 인상적이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놀라움을 선사하는 글의 내용도 참 매력적입니다. 첫 6개월 치의 이야기를 모아 「일간 이슬아 수필집」을 냈고 지금까지 1만 부가 넘게 팔렸습니다. 지난달 출판한 「심신 단련」이라는 두 번째 수필집도 인기가 치솟는 중입니다.
「회색 인간」
김동식 지음, 요다
김동식 작가는 1년 6개월 동안 300여 편이 넘는 단편을 ‘오늘의 유머’ 게시판에 올렸습니다. 글 한 편의 길이를 원고지 30매로만 잡아도 원고지 1만 매의 분량이에요.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이 1만 6,500매라고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작업량입니다. 하지만 그를 ‘그동안 없던 작가’라고 칭하는 이유는 기존의 익숙함을 넘어서는 소설 속 문장, 문체, 단어, 예상치 못한 반전 때문일 겁니다. 글쓰기를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다는 김동식 작가의 「회색 인간」, 「세상에서 가장 약한 요괴」, 「13일의 김남우」라는 3권의 책은 출판되자마자 온라인 서점에서 재고가 떨어질 정도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추천의 글을 쓴 김민섭 작가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지?’라는 생각에서 글을 읽기 시작해 ‘이 글을 책으로 소장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김동식 작가의 소설집을 출판했다고 합니다. 김동식 작가의 글을 딱 한 편만 읽어도 이 말에 동의하게 되실 겁니다.
「일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 지음, 창비
한국문학의 독자층은 아무리 넓게 잡아도 2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등단작이 누적 조회 수 40만 건이라니요. 전에 그의 소설을 읽고 팬이 된 사람이 아니라 처음으로 그의 소설을 접한 사람이 이렇게 많았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트래픽 폭주로 연재하던 창비 사이트가 멈췄을 정도랍니다. 등단작이었던 「일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단편은 알랭 드 보통의 에세이에서 따온 제목이고, 카드 회사를 다니던 직원이 회장님의 심술로 월급을 카드 포인트로 대신 받게 된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공감 가는 회사 생활을 써 내려갔는지 SNS에서 입소문이 자자했지요. 장류진 작가는 10년 동안 IT기업을 다니면서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을 썼고, 지금은 전업 소설가가 되었습니다. 이 책의 단편들은 ‘판교 리얼리즘’ 장르를 개척했다고 평가받습니다. 꼭 IT 기업에 다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2030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마음 깊이 공감할 내용일 겁니다.
「보건교사 안은영」
정세랑 지음, 난다
출판 편집자였던 정세랑 작가는 장르문학 전문잡지인 월간 「판타스틱」에 「드림, 드림, 드림」을 발표하며 데뷔했지요. 이후 「이만큼 가까이」로 창비장편소설상을, 「피프티 피플」로 한국일보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정세랑 작가를 SF 작가로, 판타지 작가로, 팩션 작가로, 호러 작가로, 스릴러 작가로 부르는 열혈 팬들은 ‘정세랑 월드’라는 말을 사용할 정도로 팬층이 두텁습니다. 정세랑 작가의 소설에는 로봇도 나오고 용도 나오고 도깨비나 외계인도 등장하지만 환경 문제, 남녀 문제, 경제 문제를 비롯한 현실적인 감각이 살아있어요. 「보건교사 안은영」에는 보건교사이자 퇴마사인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내년에 넷플릭스의 드라마로 만날 수 있는 작품이지만, 그 전에 미리 책을 읽으며 ‘정세랑 월드’로 입문하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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