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내린 눈으로 골목은 빙판길로 변하고, 바람이 몰고 온 강추위 속에 “찹쌀떡이나 메밀묵 사려. 찹쌀 떠∼억!”이라 외치던 찹쌀떡 장수가 생각나면서 50여 년 전의 추억 속으로 잦아든다. 이날도 동생들과 냇가에서 앉은뱅이 썰매를 탄 것 외에는 별다른 즐거움을 맛보지 못하고 아랫방에 배를 깔았다. 머슴이 해놓은 갈비로 아랫목은 철철 끓었지만 외풍이 심하여 얼굴만 삐죽이 내놓고 호롱불에 의지하여 그 당시 우리에게 인기였던 ‘학원’을 읽고 있었다. 그것도 지루하여 시나브로 잠에 빠질 즈음, 똑, 똑, 똑, 텃밭으로 내놓은 조그마한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반가움과 놀라움에 뛰어나가 보니 옆집 또래였다.
“강 건너 친구 집에서 어제저녁에 제사를 지내 또래들이 전부 모이기로 했다.”면서 같이 가자는 권유였다. 논밭을 지나고 돌다리를 건너 도착하니, 벌써 여러 고무신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고구마와 무를 담아 놓은 가마니가 즐비한 좁은 방에는 막걸리가 담긴 주전자와 술잔이 담배 연기 속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뒤이어 여자 또래도 네 명이 와서 아홉 명으로 늘어났다.
술잔을 돌리면서 유행가는 자연스럽게 따라 나왔다. 순번이 되어도 제때 노래가 이어지지 않으면, 노래를 못하면 시집(장가)을 못 간다느니,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느니, 하면서 윽박지르기도 한다. 이것도 시들해지고 뱃속이 출출해지자, 누군가 나선다. “얘들아, 닭서리 하러 가는 게 어때?” “저기 윗동네로 가자.” 그 집 꼴머슴으로 일하는 동생한테서 정보를 입수했는데, 살이 통통한 암탉이 많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의논으로 세 사람이 차출되고, 그중에 유일한 나는 망보기로 끼어들었다. 1월 초순이라 초승달은 벌써 사라진 지 오래고, 칠흑 같은 밤중에 관솔불에 의지하여 돌다리를 힘겹게 건넜다.
설마 했더니 찾아간 그 집은 신작로 옆에 위치한 우리 옆집이라 이 집을 포기하고 다른 집을 찾자고 했으나 막무가내였다. 이러한 경험이 전혀 없는 나는 추위와 두려움에 떨면서 할 수 없이 약속대로 대문 옆에 엉거주춤 서 있었고 친구들은 얕은 담을 훌쩍 넘어 들어갔다. 닭들이 이리저리 피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면서 내 간도 녹아내린다. 무서움과 걱정으로 자꾸만 작아지려는데, 닭을 한 마리씩 거머쥔 친구들이 내 앞을 내달린다.
누군가가 뒷덜미를 낚아채는 듯한 두려움에 논과 밭을 정신없이 달렸다. 그들은 저만치 달아났지만 뒤처진 내 등으로는 쉼 없이 땀이 흐른다. 뒤늦게 도착했더니, 두 명은 무용담에 정신이 없다. 여럿이 달라붙어 닭을 잡고 양념을 만드느라 부산을 떤다. 고기를 뜯느라 정신이 팔렸는데 불쑥 문이 열리면서 차가운 바람과 함께 앙칼진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놈들 이제야 잡았구나. 지난번 닭도 너희들 짓이지. 그래 잘됐다. 다들 주재소로 가자.”
내가 망을 보면서도 계속 걱정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어제만 해도 진지 잡수셨냐고 두 번이나 인사드린 할머니다. 친구들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지만 나에 대한 원망은 더욱 심하셨다. 옆집에 산다는 네가 말리지는 못할망정 망까지 봤다는 말에 혀까지 껄껄 차시며 진노하셨고, 중핵교 다니는 녀석이 싹수가 노랗다며 꾸중을 그치지 않았다. 한쪽 다리가 불편하신 그분은 소변보러 닭장 옆에 있는 뒷간에 나오셨다가 바닥에 흩뿌려져 있는 날개들을 보고 불 켜진 집을 찾아왔다고 하신다. 우리의 변명에도 아랑곳없이 주재소로 가시자는 으름장에, 지난번에 도둑맞았다는 세 마리까지 합해서 다섯 마리 값을 고스란히 물어야만 했다.
현금이 귀했던 터라 쌀, 보리쌀, 콩 등을 거두고 장날에 현금으로 만들어서 갖다 드렸다. 들키지 않았다면 하나의 장난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사건이었지만, 부모들에게 혼나고, 만나는 어른마다 ‘밤참 맛이 어떻더냐?’는 비아냥거림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던 며칠간이 지금도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글 / 사외독자 이선기 님(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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