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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일상다반사

[에피소드] 말이 돼요


집에는 원목으로 다듬은 17cm 두께의 바둑판이 있다. 40여 년 전, 바둑판을 하나씩 매고 다니는 사람으로부터 거금을 주고 산 명품이다. 친구들과의 대국과 독학으로 아마 1단 정도는 된 후에, 지인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세상사를 나누며 즐긴다는 게 구매할 때의 다짐이었다.
대국할 기회는 여러 번 있었지만, 시력이 좋지 않아 한두 판에도 눈의 피로가 심하고 흥미가 일지 않아 책만 여러 권 구매해 놓고는 베란다 구석에 애물단지가 되어 처박혀 있었다. 그러던 차에 손자가 바둑학원에 다니고부터 빛을 발하고 있다. 바둑 자체는 걸음마 단계라 대국할 형편이 못되지만, 바둑알 까기는 우리 가족 사이에서는 고수의 반열에 올랐다.
어른이 들기에도 무거운 바둑판이라 두 손으로 질질 끌고서 거실까지 옮겨다 놓고는 만만한 상대부터 부른다.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고 여러 번 다섯 알씩을 가지고 겨룬 결과 가족 간의 서열은 정해졌고 쉽사리 바뀔 것 같지도 않다.
나와 아내는 적수가 되지 못해서 2대 5다. 손자가 두 알이면 우리는 다섯 알을 가지고 겨루어야 비등해진다. 차이가 심하니, 몇 번 안 가서 흥미를 잃고 다른 상대를 찾기 마련이다. 아들은 1대 2 정도고 사위는 대등하다. 그래서 항상 마지막으로 겨루게 되는데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10시쯤 시작하면 12시까지는 기본이니. 옆에다 점심상을 차리는 데도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며느리가 몇 번이나 이름을 불러서야 마지못해 아쉬움을 접는다. 다과를 하는 중, 내 옆에 와서 앉더니 귓속말로 “할아버지, 나한테 물어볼 게 없어요?” 그런다.
“많은데, 무엇부터 할까?”
“1학기 성적표는 모두 ‘참 잘했어요.’를 받았어요.”
“내 손자, 대단하구나!”
다들 손뼉을 치면서 기쁨을 나누고 있는데, 사위가 물었다.
“2학기 반장선거는 어떻게 되었니?”
모두가 결과를 알고 있고, 손자의 자존심을 건드릴까 봐 금기시하고 있는 마당에…. 갑자기 손자의 숨소리가 높아지더니 “할아버지, 말이 돼요. 여자애들이 똘똘 뭉쳐서 10표로 반장을 뽑았어요.”
반에는 남자와 여자가 각각 10명이란다. 이 중에서 남자는 8명이, 여자는 2명이 입후보했다. 남자 8명은 누구나 자기 표만 얻었고, 여자애는 한 명은 10표, 다른 애는 2표를 얻었다. 남자의 2표까지 여자 쪽으로 넘어간 것이다. 반장을 많이도 하고 싶은가 보다. “이제 3학년이잖아. 앞으로 4, 5, 6학년이 남아있는데 무엇이 걱정이냐. 언젠가는 틀림없이 반장이 될 터이니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과도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한참 뒤에야 가느다란 목소리로 “네.”한다.
가족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지만, 손자의 진지한 게임 자세를 보는 재미가 남다르다. 더욱이나 이기고 질 때의 환호와 탄식을 공유하며 승리욕에 동참하니 에너지가 넘친다.

 

글 / 사외독자 이선기 님(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