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대우를 받은 지도 오래되다 보니, 首丘初心이라고, 젊은 시절의 추억이 불쑥불쑥 돋아나곤 한다. 그러던 차에 지난번 여행에 동행한 부산친구가 초청을 해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은 첫 직장의 사연들이 묻혀있는 장소들을 돌아보기로 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입사시험을 보려고 들어간 D 여고의 교문에서부터 추억을 더듬었다. 그곳에서 횡단보도와 철길만 건너면 바로 첫 근무지다. 늘어나는 수출물량을 채우느라 구내식당에서 세 끼니를 때우며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휴일이라고는 한 달에 하루나 이틀뿐, 20개월간 청춘을 불살랐던 그곳은 상상도 못 한 재래시장의 주차장이 되어 나를 맞았다.
단층의 정미소로 출발하여 필요할 때마다 쌓아 올린 7층 건물은 외관으로는 번듯했지만, 담장 안에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데다 건물 내부는 미로처럼 구성된 열악한 환경이었다. 국내 최고 최대의 신발공장으로 사원들의 월급은 최상급이었지만, 여름철에는 고무를 찌면서 내뿜는 50도가 넘는 열기를 온몸으로 안으며 근무해야 하는 고통의 나날이었다.
잠시나마 시원한 바람을 쐬기엔 에어컨이 가동되는 은행이 있었고, 부실한 식당 반찬은 길 건너 시장통의 꼼장어 구이로 보충했다. 최대한 빨리 점심 식사를 마치고, 눈치 보며 앉아 있었던 은행은 큰길 건너로 옮겨갔고, 100원에 6~7마리를 구워주던 아주머니들은 수족관을 갖춘 번듯한 횟집 주인이 되어있었다.
몇천 명이 동시에 퇴근하면서 왁자지껄하던 정문은 친구나 애인 만나러 온 청춘남녀, 외상값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빚쟁이, 싸구려 물건 사라고 아우성치던 잡상인들이 눈에 삼삼한데, 어느덧 대형 주차장 출입구가 되어서 기다란 막대기만 오르내리고 있었다.
지치고 답답한 가슴을 열고 싶을 때 뛰어 올라가서 바다를 바라보며 심호흡하던 자성대공원은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입사 동기들의 수많은 사연을 지켜보았던 상록수들은 변함이 없건만, 시원한 바람을 안겨주던 푸른 바다는 삐죽삐죽 솟은 건물 속에 묻혀서 구름에 가린 하늘만 빼꼼히 보일 뿐이다.
대학 동기에다 입사 동기인 세 명이 이웃하며 신혼살림을 차렸던 골목길은 어렴풋하게 만이라도 기억되지만, 단층이었던 가옥은 2~3층으로 변하여 옛 모습이라고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입사 날에 결혼하여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 친구가 살던 집 앞의 (여러 가족이 물지게를 이용해서 물을 날랐다) 공동우물을 찾으려고 여러 번 주변을 헤매도 흔적조차 가늠할 수 없어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늦은 시간 퇴근하면서 거닐던, 산허리를 휘감아 도는 도로는 짭짤한 갯바람에 묻어오는 비릿한 생선 냄새로 가득했다. 수많은 계단을 오르느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도착한 이 도로에서는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고, 차들의 전조등은 공중을 나는 비행기 불빛같이 운치 있게 보였는데….
고향을 드나들면서 차창으로 바라보며 감탄하던 구포나루를 떠올리면서 상경 때는 비행기를 해약하고 열차에 몸을 맡겼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질박한 고향 사투리에 묻어 드는데, 구포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그 당시에는 석양빛을 등에 지고 한두 척의 황포돛배가 강물을 오르내려서 한 폭의 동양화를 감상하듯 했는데, 돛배는 오간 데 없고 볼품없이 들어선 고층 아파트 사이로 희뿌연 연무만 깔려있어 가슴이 아려온다. 추억은 추억으로만 간직해야 하나 보다! 추억 속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아쉬움과 바쁘게 돌아다닌 노독이 겹쳐서 긴 하품과 함께 어느새 졸음이 몰려왔다.
글 / 사외독자 박수호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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