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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이야기] 산해경 삼족오 山海經 三足烏

by 앰코인스토리 - 2018. 8. 22.

안녕하세요, 앰코인스토리 독자 여러분. 무더위 가운데 건강은 잘 지키고 계시는지요?

자, 이번 호에는 《산해경(山海經)》 속 일부 내용에 등장하는 태양 속의 까마귀 즉, ‘삼족오(三足烏)’의 기원을 몇몇 사료와 연구 자료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문자 그대로 삼족오는 발이 세 개 달린 까마귀를 지칭하는데, 특히 한국 드라마의 사극에서 주로 고구려군이 그 문양의 깃발을 사용하여 우리는 은연중에 고대 한국인의 그 어떤 상징적 표식이 아닌가 미루어 짐작함이 당연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삼족오의 해석이 중국의 신화서인 《山海經》에 존재하는 바에야 좀 더 정확한 출처와 그 내력을 살펴볼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답니다.


『산해경』 p.306 삽화


1. 삼족오의 기원

까마귀가 문헌에 최초로 보이는 것은 《山海經》의 <대황동경(大荒東經)> 편인데,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湯谷上有扶木,一日方至,一日方出,皆載於烏。
탕곡 위에 부목이 있는데, 한 개의 해가 막 도착하자 다른 해 하나가 막 떠나고 있다. 해는 까마귀 등에 얹혀 있다.

[주석] 장수철, 『산해경』, 현함사, 2005. p.307.

위의 皆載於烏의 해석을 보면, 단지 ‘까마귀가 해를 업고 있다’ 정도인데, 어떻게 갑자기 그 까마귀가 발이 세 개인 삼족오로 해석이 바뀌었을까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료에 따르면, 원래는 발이 두 개인 정상적인 까마귀가 발이 세 개인 삼족오로 전환된 시기는 일반적으로 전한(前漢, 기원전 202~) 이후로 그 과도기를 정합니다. 부연하자면, 기존에는 정상적인 이족오(二足烏)였는데 삼족오로 바뀌었다는 것으로써, 그 연변(演變)에 있어 다양한 추정 원인 중에 두 가지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金乌图”应该是将乌鸦的二足与尾部放到了同一个平面上,造成了“ 三足”的错觉,殊不知这是先民画风稚嫩的缘故。
금오도는 분명 까마귀의 두 발과 꼬리 부분을 같은 평면상에 그려 놓은 것인데 본의 아니게 이것은 상고시대 화풍의 미숙함이 원인으로써 삼족의 착각을 불러오게 되었다.
2) 《老子》 中也云 : “有生於無,道生一,一生二,二生三,三生万物。”
“있음은 없음에서 나왔고, 도는 하나를 만들고, 하나는 둘을 만들고, 둘은 셋을 만들고, 셋은 만물을 만든다.”

[주석] 田冬梅, 张颖夫, <“三足乌”起源考> 唐山师范学院学报, p.39.

첫 번째는 상고시대의 태양 속 까마귀 그림을 전한 시기에 이르러 그 꼬리를 발로 착각하여 삼족으로 그리게 되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노자(老子, BC 571~471)가 지은 《도덕경(道德經)》의 인용을 빌어, 역시 동시기에 좀 더 상서로운 상징적 존재로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그리기 시작하였다는 해석입니다. 이는 이어서 마찬가지로 《山海經》 내용 속의 烏도 비슷한 시기에서부터 단지 까마귀가 아닌 세 발 달린 까마귀, 이른바 삼족오로 해석되기에 이르렀습니다.


人民大學學術論文
<“二足金烏”考> p.1


2. 三足烏, 東夷族, 高句麗 (삼족오, 동이족, 고구려)

우리는 우리 민족을 일반적으로 동이족(東夷族) 즉, 동쪽의 활을 잘 쏘는 민족의 후예로 인식하여 왔으며, 또 이것은 역사적 근거가 있는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 근거를 짧게 고찰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상고(上古) 시대에 태양 숭배와 새 토템의 전통을 지닌 동이족은 중국의 서북에서 동북 방면으로 이동하여 한 갈래는 산둥반도 지역으로 남하하였고, 또 다른 한 갈래는 동으로 나와 만주·한반도·일본 일대에 분포하게 되었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주석] 金庠基, 「東夷와 淮夷·徐戎에 대하여」, 『東方史論叢』, 1974, p.424.

여기서 상고 시대는 제준(帝俊)을 섬기던 상(商, BC 1600~BC 1046) 즉, 은(殷)나라를 말하는데, 주(周, BC 1046~BC 771)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라고 볼 수 있으며, 동이족으로서 한대 이전부터 이미 새의 토템이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입니다.

부연하자면, 춘추전국 시대와 진시황의 진(秦, BC 221~206)을 거쳐 전한(前漢)으로 이어지면서 이런 동이족 문화는 자연스럽게 중국의 문화에 흡수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전한 말기에는 이런 삼족오 문양이 태양으로부터 분리되어 서왕모(西王母, 한족(漢族) 전통신앙)의 권속으로 등장하거나 점차 그 지위가 낮아지고, 반면에 부여의 귀속을 통한 고구려(BC 37~AD 688)의 부흥과 더불어 삼족오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삼족오의 근간이 동이족이라는 것과 우리의 역사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이계 설화에서 까마귀는 태양과 왕을 상징하거나 왕과 왕재(王才)를 보필 내지 위험에서 구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이에 관한 내용을 동이계인 한(韓)민족의 설화와 고문헌에서 찾아보면, 먼저 까마귀가 태양 또는 왕을 상징하는 경우는 태양신의 성격을 지닌 북부여의 해모수(解慕漱)가 머리에 쓴 오우관(烏羽冠, 까마귀 깃털로 만든 관), 일본으로 건너가 왕과 왕비가 된 일월지정(日月之精, 해와 달의 정기)의 상징인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이름의 ‘오(烏)’,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弓裔)에게 ‘왕(王)’자가 새겨진 상아 조각을 전한 까마귀 등이 있다.

[주석] 김주미, 「한민족과 해 속의 삼족오」, 학연문학사, 2010, p.160.

역사란 시연(試演)이 없다고 하지만, 짧은 삶조차도 가끔 반추하여 부족했던 과거를 그랬으면 어땠을까 하는 미련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고대 역사에서 고구려의 연개소문(?~665)이 보장왕(642~668)을 옹립하지 말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면 어떠했을까, 혹은 이성계(1335~1408)가 위화도 회군을 하지 않고 최영(1316~1388)의 명에 따라 혼란한 명나라를 누르하치의 청나라보다 먼저 그대로 중원에 내달렸다면 우리 역사는 지금 어땠을까 하는 가정을 하며 안타까워하곤 하였습니다. 우리 한민족의 고대사를 우리의 역사서가 아닌 단지 공정(工程)된 중국의 사서로만 대략 확인해 볼 수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고구려 쌍영총 널방 삼각고임 1층 밑면 동쪽에 그려진 삼족오


이상으로 산해경에 등장하는 까마귀와 삼족오, 그리고 동이족과의 연관성을 소소하게 살펴보았습니다. 또 다른 중요한 중국의 신화서 중의 하나인 <목천자전(穆天子傳)>도 있지만,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소설로서의 신화를 끝내고 다음 호에는 그 뒤를 잇는 위·진·남북조 시대의 지괴 소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오늘 기억해두기

《단어》
词语(어휘) : 东北工程
拼音(병음) : dōngběigōngchéng

《예문》
“东北边疆历史与现状系列研究工程,简称东北工程,其中主要研究内容包括 : 古代中国疆域理论研究;东北地方史研究;东北民族史研究;古朝鲜、高句丽、渤海史研究。”
“동북변경 역사와 현상 계열 연구공정, 줄여서 동북공정이라고 한다. 그중 주요 연구내용은 고대 중국 강역이론연구, 동북 지방사 연구, 동북 민족사 연구(고조선, 고구려, 발해사 연구)을 포함한다.”

출처 : 东北边疆历史与现状系列研究工程_百度百科

‘工程’이란 말은 쉽게 표현하자면, ‘뜯어고친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동북공정은 동북의 고대사를 중국의 입맛에 맞게 재단한다는 의미로써, 우리의 고대사인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이미 중국 대부분의 청소년은 고구려사를 단지 중국의 지방정권 정도로 이해하고 있으며, 동북공정이란 말조차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중국의 현·당대 공산당 총리를 지낸 주은래(周恩來 1898~1976) 때만 하여도 고구려 역사는 한민족의 것이라 인식하였습니다. 하지만 후진타오와 시진핑으로 이어지는 현 중국 정권에서는 한국 고대사 편입을 너무도 뻔뻔하게 진행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WRITTEN BY 송희건

“君子以文會友, 以友輔仁.”
“군자는 배움으로 친구를 사귀고, 그 친구로써 인의를 다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