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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일상다반사

[에피소드] 힐링 여행

by 앰코인스토리 - 2018. 6. 29.


여행 버킷리스트의 1순위는 아프리카의 사파리고, 다음은 러시아였다. 사파리는 이리저리 저울질하다가 시기를 놓쳤음을 깨닫고 에버랜드를 찾은 것으로 마음을 달랬다. 러시아는 반공방첩이 국시이던 초등시절에 동토의 나라로 각인되었다. 많이 변했다지만 무언가 다른 것이 있을 것만 같아서 동행을 찾던 중 부산에서 사업을 하는 초등학교 동기와 안부 전화 중에 동참을 허용받았다. 러시아 일주냐,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발트 3국을 포함하느냐로 고심하다가 4개국을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사전지식이 없다시피 한 발트 3국은 정수기와 공기청정기, 그리고 아토피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청정국가였다. 구소련의 위성국가였지만 지금은 어엿한 유럽연합체다. 3개국을 합해야 한반도의 2/3 면적에다 인구는 겨우 630만, 복지혜택이 우리보다 좋다지만 매년 10만 정도가 북유럽 등으로 빠져나간다고 한다. 도로 양쪽으로 자작나무와 적송으로 숲을 이룬 침엽수는 내려갈수록 활엽수로 바뀌는 것 외에는 어디나 김제 평야다. 가장 높은 곳이 해발 318m라 지평선만 보일 뿐이다. 러시아에서는 둑마다 민들레가 군락을 이루더니 아래쪽으로는 끝 간데없는 유채꽃이 봄이 왔음을 알렸다. 여행 동안 맑은 공기에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에 15~25도를 넘나드는 날씨로 반소매를 입은 날은 소름이 돋았지만, 현지인은 반소매 차림이 많았고 간혹 핫팬츠의 아가씨가 눈길을 잡았다.



뉴스라고는 일 년에 한 손에 셀 듯 그날이 그날인 나라들이라 특이하게 볼 것도 즐길 것도 없었지만,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자작나무 숲과 늪지대(어린 시절, ‘늪에 빠지면 서서히 사라져서 며칠 뒤에 시체가 되어 강으로 빠져나온다’고 겁을 주던 어른들이 떠올라서 웃음이 나왔다), 2천여 평의 야산에 10만 개 이상의 십자가들로 뒤덮인 언덕이 경이로웠고, 유네스코에서 인정한 목각공원은 한 노인의 예술적 안목이 탁월함을 증명했다. 화장실의 샤워기 사용법이나 현관문을 여닫는 불편함으로 몇 번의 소동이 일어났고, 누군가는 사진을 찍다가 개에게 물려서 병원을 찾아 응급처치를 받았다. 노인들이 깜박하는 탓으로 휴대전화 충전기를 가이드가 긴급 수배를 하고 고가의 짐을 놓고 나와서 이틀 만에 찾은 해프닝도 여행의 묘미를 돋우었다.



마지막 밤은 해변의 국경지대에서 보냈다. 수십 리에 펼쳐진 보드라운 모래사장이 탐이 났고, 수심이 얕은 데다 염도까지 낮아 짜지 않고 잔파도가 자주 몰려와서 형성된 좁은 간격의 모래층이 신기했다. 백야의 시작이라 10시에 지는 일몰을 사진기로 담느라 두어 시간을 해변에 머물렀다. 친구가 알려준 대로 갈대와 모래층을 배경으로 한 붉은빛으로 수놓은 저녁노을을 담은 사진이 신비롭다. 러시아는 달랐다. 하늘과 공기는 우리의 일상과 비슷했고, 푸틴의 취임식을 치른 직후인 탓인지 거리는 활기에 차 있었다.


런던과 파리에 비견해도 될 법한 고대의 바로크, 로코코, 고딕식의 성당과 대형건물들이 상트페트로 부르크의 중심가를 점령하고 있어서 악소 국가에서 자란 우리들의 기를 죽여 놓았다. 여름궁전과 에르미타주 국립박물관은 베르사유궁전과 런던박물관을 다시 한번 보는 착각을 가져왔다. 특히나 포트로 대제의 여름궁전이라는 별칭으로 더욱 유명한 ‘페테르 드보레츠’는 1000헥트라에 이르는 광활한 면적에다가 7개의 작은 정원에 설치된 144개의 분수가 여러 형태로 물을 뿜어내고 있어서, 가이드가 옆에 와서 모두가 기다린다는 말에 화들짝 놀라 아쉽게 자리를 떴다. 러시아가 초행인 발트 출신 기사와 경험이 일천한 가이드와의 의견 소통이 원활하지 못하여 현지 가이드를 찾는다고 두 시간 반을 헤맸다. 이 바람에 현지 책임자가 나와서 사과하고 운하 유람이 취소되어 50유로를 반환받는 소동이 벌어진 게 이번 여행의 옥의 티였다.



동심으로 돌아가서 친구와 나눈 수많은 이야기가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추억이 되리라. 고맙다. 친구야!



글 / 사외독자 이성재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