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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iconductor/스마트 Tip

[역사 속 엔지니어] 스티브 잡스, 철학을 담은 발명으로 세계인을 사로잡은 IT 천재

by 앰코인스토리 - 2017. 10. 10.


철학을 담은 발명으로 

세계인을 사로잡은 IT천재

스티브 잡스


아이폰4를 발표하는 잡스 https://ko.wikipedia.org/


세계 7억2천만 명이 아이폰을 쓰고 있습니다. 이달 5일은 스티브 잡스(1955~2011)가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꼭 6년째 되는 날인데요, 언제나 우리에게 놀라운 선물 보따리를 안겨 줄 것만 같았던 그가 너무도 빨리 우리 곁을 떠나버렸습니다. 애플은 지난달 12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애플파크에 위치한 스티브잡스 극장에서 잡스의 정신을 기리는 시간을 갖고, 아이폰 10주년 기념 신제품을 선보이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바처럼 그렇게 평범한 출생과 성장과정은 아니었지요. 그는 1955년 2월 24일, 조앤 시블로와 시리아 출신의 압둘파타 존 잔달리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딸의 결혼을 결사 반대했던 조앤의 아버지 때문에 두 사람은 결혼하지 못하고 헤어져 결국 둘 사이에 태어난 아기는 입양을 가게 됩니다. 생모는 대학교육을 받은 입양가정을 찾았고 변호사 부부가 입양할 뻔 했지만, 그들이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딸을 원하는 바람에 다른 가정을 찾아야 했습니다.


결국, 폴 라인홀트 잡스 가정에 입양된 아기는 스티브 잡스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양부모를 찾던 생모의 바람과는 달리 아기를 입양한 잡스 부부는 고등학교도 중퇴한 사람이었지만 아기를 꼭 대학교육까지 시키겠다는 사인을 하고 난 뒤 입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훗날 잡스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어깃장으로 비싼 등록금을 자랑하던 리드대학 철학과에 진학하여 양부모를 포기시키려 했지만 그의 생각과는 달리 양부모는 최선을 다해 등록금을 대주려 애썼습니다. 아기 때의 약속을 양부모들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맥북에어를 발표하는 잡스 https://ko.wikipedia.org/


그러나 스티브 잡스는 비싼 등록금과 적성에 맞지 않는 과목들 때문에 1년도 안되어 대학을 자퇴하는데요, 캘리그라피 수업만은 계속해서 들었는데, 이때 배웠던 아름다운 서체 공부가 훗날 그가 발명한 제품의 폰트 디자인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학교를 자퇴한 잡스는 ‘아타리’라는 전자게임 회사에 취직해 얼마간 다녔지만 그만두고 홀연히 수개월 동안 인도 히말라야 일대를 수행하며 불교에 심취하기도 했습니다. 회사 이름이 ‘애플(Apple)'이 된 유래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잡스가 선불교 수행의 장소였던 오리건주 사과농장을 연상하며 이름 지었다고 애플의 공동 창업자였던 스티브 워즈니악이 밝힌 바 있습니다.


애플I https://ko.wikipedia.org/


애플II https://ko.wikipedia.org/


몇 년 후 잡스는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어린 시절부터 친한 형이었던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홈부르 컴퓨터 클럽에 가입해, 잡스의 집 차고에서 애플을 설립하고 1976년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인 ‘애플I’을 발명하였습니다. 소량 생산된 까닭에 큰 파급력은 없었고 모니터도 없고 투박한 디자인의 컴퓨터였지만, 애플신화의 출발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후 가능성을 직감한 워즈니악과 잡스는 1년 뒤 ‘애플II’를 내놓게 됩니다. 컬러 그래픽과 플로피 디스크 형태로 초창기 개인용 컴퓨터 시장을 휩쓰는 대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그는 이제 억만장자가 되었고 미국에서 최고의 부자대열에 올랐습니다. 스티브 잡스의 탁월함과 고집스러움이 빛을 발하는 시기였지요. 그러나 그의 이러한 성격이 스스로를 곤란에 빠트리기도 했습니다. 사람들과 화합하지 못하고 크고 작은 마찰을 불러일으키기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애플기기로 표현한 스티븐 잡스 https://namu.wiki/


1984년에는 매킨토시를 내놓아 그래픽 분야에 지지를 얻으며 또 한 번의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리사 컴퓨터와 함께 너무 비싼 단가로 인하여 다른 경쟁사와의 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했는데요, 리사 컴퓨터는 그가 처음에 자기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다가 친자소송 확인 이후에 미안한 마음으로 그의 딸 이름을 따서 만들었던 컴퓨터였습니다. 응용 소프트웨어의 부족으로 사람들은 불편을 호소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판매부진으로도 이어져 심각한 경영난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고집스런 잡스의 행보 때문에 애플사의 경영진과 핵심 엔지니어 사이에 불화와 반목이 심해지고 잡스에 대해 불만과 배신감이 커지며 회사를 곤경 빠트린 자로 지목되어 자신이 만든 애플사에서 결국 1985년 5월에 쫓겨나게 됩니다. 잡스 스스로에게도 큰 충격과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재기의 발판을 다지게 됩니다.


애플 스토어 https://namu.wiki/


애플을 떠난 뒤 넥스트 회사를 세워 세계 최초 넥스트 스텝을 개발하였고, 컴퓨터 그래픽 회사를 인수하여 ‘픽사’로 이름을 바꾸고 경영에 들어갔습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별다른 수익을 얻지 못하여 고군분투 하다가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를 만들어 대성공을 거두며 입지를 굳힙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애니메이션 <니모를 찾아서>와 <인크레더블> 등도 바로 픽사의 작품이지요. 조지 루커스로부터 천만 달러에 샀던 픽사를 성장시켜 훗날 74억 달러에 디즈니에 팔았으니 대단한 성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1997년 넥스트가 애플에 인수되면서 스티브 잡스도 다시 13년 만에 애플의 최고 경영자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돌아온 이후, 애플 신화로 여겨질 만큼 혁신적인 신제품들이 많이 나와 세상의 문화를 변화시켰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1998년 아이맥을 비롯해 2001년 MP3플레이어 시장을 장악한 아이팟은 세상을 들썩들썩하게 만들었지요. 그리고 드디어 등장한 ‘아이폰’과 ‘아이패드’. 특히 2007년에 선보인 아이폰은 그야말로 스마트폰의 혁명을 이루었고 다양성을 거듭하면서 전 세계가 주목하는 발명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빨리 그에게 찾아온 죽음. 2004년 췌장암 선고를 받고 한 차례 고비를 넘기는 듯 했으나 결국 병세의 악화로 투병하다가 2011년 56세의 나이로 세상과 작별하게 되지요. 정말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스티브 잡스. 생전에 스탠포드 대학 졸업에서 그가 남겼던 유명한 연설은 아직도 그를 그리워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이 되고 있습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네요.

“Stay Hungry, Stay Foolish.”


https://namu.wiki/




글쓴이 한지숙

글에도 다양한 표정이 있다고 믿는 자유기고가. 얼굴을 직접 마주하지 않는 인터넷 공간이라 할지라도 글을 통해 많은 이들과 마음을 나누기를 희망한다. 이를 위해 오늘도 열심히 거울 대신 키보드로 표정 연습에 열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