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오전, 하필이면 새벽부터 비가 내린다. 태풍이 남해까지 다가와서 내일까지 많은 비가 오리라는 예보다. 우비를 걸치고 장화를 신고서 동생 뒤를 따랐다. 동네를 휘도니 오랜만에 보는 맨드라미며 샐비어가 반긴다.
하지만 좋은 것만은 아니다. 간단한 벌초가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부모님의 쌍분을 찾아 동생이 예초기와 낫으로 깎아 놓으면, 나와 조카는 갈퀴로 끌어서 한쪽으로 모으는 일을 한다. 가까이 있는 조부 묘역까지 끝내고는 준비해간 술과 다과를 차려놓고 절을 올린다.
작은할머니 산소는 멀기도 하다. 할머니가 두 분이라 할아버지 묘를 중심에 두고 양쪽으로 떨어져 모시다 보니 그렇게 되었단다. 그냥 걷기에도 힘이 든다. 앞서가는 동생이 낫으로 우거진 잡초와 칡넝쿨을 쳐내고 가지를 자르지만 작년에 간 곳을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맨다. 등산에 서툰 나는 비가 내려서 미끄러운 언덕과 바위 때문에 네 번이나 엉덩방아를 찧어댔다.
내려오면서 우리 형제들에게 각별했던 아주머니 묘소까지 벌초하고는, 올해가 유사라는 아저씨 댁에서 점심을 먹었다. 본동은 물론 여러 곳에서 찾아온 피붙이를 만나는 기쁨이 쏠쏠하다. 항렬은 낮지만 나이가 많은 종손을 두 손으로 잡으며 안부를 묻고 노고에 감사드린다.
오늘은 그분의 주도로 우리 씨족 중 같은 파에 속하는 30여 명이 모여 오전에는 개별적으로 2대조까지 벌초를 하고 오후에는 공동으로 60여 기의 봉분을 벌초하는 행사다. 조상들은 조금이라도 더 나은 명당을 찾아서 이 산자락, 저 산등성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해는 가지만 후손들은 죽을 맛이다. 능선을 타면서 묘를 옮겨 다니다 보니 정말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도 이 일을 싫어하는데 신세대인 자식까지는 물려줄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진 게 오래전이다.
나부터는 화장을 하라고 자식에게 여러 번 이야기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내는 “죽은 다음에야 어떻게 할 것인가는 자식들 마음이지, 당신이 무슨 상관이람.”이란 말을 한다. 그러고 보면 아내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일까?
집안끼리의 모임이니 뒤풀이가 없을 리 없다. 문중에서 가장 어른 집에 준비해둔 돼지 한 마리 분으로 술잔을 기울이며 그간의 궁금증을 풀어본다. 예년과는 달리 댐 공사 문제로 10년을 끌어오다가 작년에야 확정된 수몰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평년이면 9월에 하는 벌초도 보상이 시작되어 타지로 이주하는 가정이 생기면서 한 달이나 앞당긴 것이 한여름이 되었음을 미안해한다. 장손은 수몰 뒤 벌초하기의 어려움과 자금 사정으로 걱정이 태산이다.
갑작스러운 목돈에 가족 간, 친척 간에 불화가 있는 집도 있지만, 첩첩 산골인 데다 재래식 방법으로 하는 농사라 소득이 적었던 탓인지, 보상금에 만족하는 표정이다. 도시에서 퇴직을 하고 이곳에 정착한 옛친구는 만날 때마다 ‘로또 당첨된 기분’이라며 민심을 전했다. 100여 가구 중 16가구는 산등성이에 집을 지을 예정이고, 다수의 친인척도 가까운 시내로 나가서 같은 아파트에 둥지를 트는 모양이다. 다행히도 우리 동네는 수몰 지역의 최상단이라 선산은 그대로 보존되고 집만 철거되었을 뿐, 집터도 볼 수 있기에 애써서 아쉬움을 달랜 하루였다.
글 / 사외독자 이수현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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