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형님, 큰처남댁 그리고 가족들에게
아직도 많이 힘드시지요? 큰형님께서 장인어른 묘비에 작성한 “아버님,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립고 고맙고 존경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이 말만큼 큰형님, 큰처남댁의 마음을 표현한 말은 없을 것 같네요. 장마라 그런지 저녁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조금 차갑더군요. 이럴 때일수록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때문인지, 저는 오늘도 일을 하러 가시던 시골 어머니가 생각나네요. 형님을 비롯한 가족들 모두, 처가에 홀로 계신 장모님을 생각하고 계시겠지요?
남남인 우리가 한 가족으로 만나게 되면서, 서로 살아온 환경은 다르지만 시골 풍경을 바라보고 자라온 소싯적 생활은 비슷하리라 봅니다. 부모님들의 지난 삶에 견줄 수는 없을 정도의 못 먹던 시절은 아니었을지라도, 어린 시절 돌이켜보면 일반미 대신 정부미 쌀로 밥을 지으면 먹기 싫어 괜한 심통 내던 시절도 있었고, 어머니가 큼지막한 쟁반에서 밀가루를 밀고 춘장을 볶아서 만들어 주던 짜장면도 있었고요.
동네 주조장으로 어른들 막걸리 심부름할 때면 돌아오는 길에 몇 모금 마셔도 봤고, 오늘처럼 비 오는 여름날이면 시골 담장에 심어놨던 애호박을 따와 칼국수를 만들어 주신 시골 어머니. 물론 처가 또한 비슷했으리라 봅니다. 비도 오고 막걸리 생각이 나서 한두 잔 걸치다 보니 소천하신 장인어른 살아생전 모습들이 생각나, 휴대전화 속 사진들을 들춰봅니다.
시골 처가에 홀로 계신 장모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비가 오길래 밭에 나가셔서 들깨 모종을 옮기셨다고 하시네요. 내리는 비를 맞으시며 옮긴 깻모가 올해는 더욱 풍성하게 잘 자라겠지요. 그래야 장모님께서 옮긴 깻모가 튼실하게 자라, 올가을 자식들에게 나눠주실 텐데요. 눈물이 나더군요. 소천하신 장인어른께서 살아계셨다면, 장모님하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라도 산비탈 밭에 가셔서 깻모를 옮기셨겠지요.
작년 이맘때 비 오는 날 아내와 처가를 갔더니 장인어른께서 지붕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을 바라보고 계시더군요. “아버님, 왜 혼자 계세요.” 여쭤보니 장모님은 깻모 옮기로 갔다고 하시더라고요. 장인어른께서는 비가 많이 와서 불편한 몸으로 올라가기 사나운 밭이기에 이러고 있다고 하시면서요.
어느덧 내일이 49재 기일이네요. 장인어른께서 떠나가시던 5월 19일 잿빛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여느 때보다 더 선명하게 보였고, 새벽하늘 잿빛 구름 속 별빛은 그 어느 날보다 빛나 보였던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빛나던 별이 잿빛 구름 속으로 숨겨질 즈음에, 장인어른 이승의 삶을 정리하여야 한다는 의사의 통보를 받고 가족들 모두 전화를 받으며 하염없는 눈물을 쏟아내던 날, 장인어른께서 소천하시고 이승과의 마지막 작별의 시간이 되는 49일제 기일이네요. 불편하신 몸으로 장애등급을 받으신 지 근 40여 년 넘는 세월이 되셨음에도 부지런하셨던 분이셨고, 장인어른 곁에는 장모님이 계셨지만 양씨 집안 장남으로서 맏며느리로서 항상 장인어른의 모든 것을 다 짊어지셨던 큰형님 내외가 있었기에, 장인어른께서는 아프신 몸에도 시골 농사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나 봅니다.
살아생전 남들 다 가는 해외여행을 형님 내외는 장인어른 거동에 힘이 드시고 몸 아프시다는 이유로 모시지 못하다가, 큰형님께서 용단을 내리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장인어른을 모시고 중국 장가계를 여행도 시켜드리고 그 넓은 대륙의 관광 코스를 휠체어로 또는 다니기 힘든 굽이굽이 계곡 길들은 등에 장인어른을 업고서 다니신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눈물도 났고요. 큰형님 등에 업혀 이국 풍경을 구경하시는 장인어른의 미소를 보게 되었을 때, 잘 왔구나 싶었습니다.
양씨 집안의 장남으로서 모든 대소사를 챙기며 형제들 간의 우애는, 맏며느리 형님댁의 부모 공경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자식도 하기 힘든 장인어른의 병간호 및 아프신 어른을 모신다는 건 쉽지 않은데도 형님 내외는 가시는 그 날까지 끝까지 효를 다하셨습니다. 시골 농사일이 사람 인력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닌 데도 장인어른께서는 시골 인심은 농사 인심이라며 늘 가족들의 뒷바라지를 불편하신 몸으로 해오셨고, 술도 담배도 즐겨 하셨지만 항상 맑은 정신을 가지고 계셨던, 그리고 오직 가족만을 위한 삶을 살아오신 분이셨지요.
이승의 삶을 다하신 장인어른의 운명을 보면서, 불편한 몸이지만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가장으로 6남매 모두 무탈하고 소탈하게 잘 키워내셨고, 팔순을 기점으로 건강에 이상신호가 오면서 병원 신세를 지곤 하셨지만, 돌아가시는 그 날까지 장인어른께서 이승의 마지막 자락을 붙잡으시다가 처가 안마당에서 평소 장인어른이 쉬시는 방안에서 삶의 끈을 천천히 놓으셨던 것 같습니다.
처가 가족 모두가 모여 마지막 가시는 길을 보게 하려고 애쓰신 장인어른의 마지막은 많이 슬펐으며 그 끈을 조용히 내려놓으신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조용히 눈물을 삼키고 있는 큰형님 내외를 보았을 때 차마 무슨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흘간의 장례를 무사히 치르는 동안, 세상 사시면서 남에게 그 어떤 해코지도 하지 않으셨던 분이셨기에 많은 조문객은 장인어른의 영정에 절을 올리며 향을 피웠는가 봅니다.
부모상은 자식 손님이고 자식 결혼은 부모 손님이듯이, 소천하신 장인어른의 후한 인덕으로 조문행렬도 많았으며, 아내에게 해주는 위로가 사랑이겠지만 오십여 년 넘게 장인어른과 두 손 잡고 지내셨던 장모님을 내일은 꼭 한번 안아드리고 싶은 게 지금 진실한 마음입니다.
내일이면 장인어른 49재이기에 모두 모이겠군요. 저는 영산포 홍어를 사 가지고 가렵니다. 장인어른께서 오래전 광주에 오실 때 홍어를 맛있게 드셨던 기억이 나더군요. 그래서 홍어를 사 가지고 가렵니다. 처가 6남매 집안 곳곳에 웃음과 행복, 그리고 사랑과 기쁨이 넘쳐나도록 장인어른께서는 오늘도 내일도 너그러운 웃음 지으며 우리를 바라보고 계실 것이고, 두서없는 글이지만 장인어른이 마지막 가시는 그 날까지 모신 큰형님, 큰처남댁에게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건네지 못했는데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인사드립니다.
2017년 7월의 어느 날,
광주에서 막내 올림
글 / K4 제조3팀 김대봉 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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