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가 뜬금없이 "할아버지, 속담 이어가기 하자. 내가 먼저 할게." 한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도랑 치고 가재 잡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 갑자기 머리가 멍멍한 게 아무것도 생각나질 않는다. "할아버지 뭐하는 거야. 심심해! 딱지치기하면 안 될까?" 꾸물대는 내 손을 잡아 끌고 작은방으로 들어간다.
여러 번 해본 숙달된 솜씨인지라 능숙하게 두꺼운 패드를 깔고 딱지를 10장씩 두 패로 나누는 손자에게 “학교서 받은 상장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가져왔냐?” 하니 며느리 가방을 뒤지더니 비닐커버 속에 넣은 상장과 금장트로피를 끄집어내어 보여준다. 표창장 1장과 상장이 2장, 그리고 공차는 소년모형의 최우수선수상이라고 찍힌 트로피가 하나다. 조금 전에 며느리가 “지난번에는 4강에 들어서 누구나 똑같은 상을 받았지만, 이번에는 4팀이 경기를 했는데 ○○네가 1등 상을 받았어요.”하더니 그 상인가 보다.
“할아버지가 기분 좋게 보았으니 상장마다 만 원씩, 4만 원을 주는 거야.”하면서 건넸더니 잽싸게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그 돈 가지고 뭐할 거야?” “저금해야지요.” “저금도 좋지만, 3,000원은 가지고 다니면서 친구가 군것질할 때 너도 사 먹는 거야. 돈 받은 것은 차 타고 갈 때까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그 뒤로 딱지치기에다 오목 두기와 팽이 돌리기를 하다가 8시에 헤어졌다. 월요일 아침, 아들의 안부전화를 받는 아내의 목소리가 심상찮다.
“너의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잖아.” 헤어질 때 지하주차장에서 아내가 손자를 유도해서 돈 받은 사실을 모두가 알았나 보다. 다음날인 일요일, 손자가 사전 허락도 받질 않고 2만 원대의 장난감을 산 게 화근이 되어 ‘아버님 때문에 애 버릇 나빠진다.’는 불평이 있었나 보다. 그게 걱정이라면, 저금한다고 했으면 좋았을 것을.
내 할아버지는 부지깽이에게도 도움을 청한다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수확기에 놀아달라고 보채면 하던 일도 팽개치고 장독대 옆으로 갔다. 탈곡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한 그곳을 벗어나서 나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서울 봤나’와 내 겨드랑이를 부여잡고 좌우로 흔들며 ‘불무불무 불무야’를 부르면서 놀아주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라서 그 분을 잊지 못하고 있다.
손자가 나를 기억해 주기를 바라며 시작한 것이, 설과 추석에 차례를 지내고 나서 10만 원을 묻어두고 3패로 나누어서 하는 윷놀이가 있다. 일회성 이벤트로는 손녀 생일잔치를 마치고 남녀노소가 지켜보는 가운데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벌린 딱지치기다. 이번에 야심작으로 시도한 것이 상장 하나에 선물 하나였는데, 예상치 못한 악재가 발생하여 중단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지난 토요일, 다음 달 초에 아내가 미국에 가게 되어 생일을 2주나 앞당겨 외식을 했다. 샤부샤부 요리를 맛있게 먹고 돌아오는 차내에서, 아들과 손자가 학교생활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며느리가 끼어들어서 부부간의 대화로 바뀌었다. 한참을 가만히 있던 손자가 “속담처럼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네.” 갑작스러운 항의에 아들은 웃으면서 “아버지, 잡문 하나 쓰게 생겼네요.” 뜻도 모르면서 달달 외운 줄로만 알았는데, 그건 아날로그 세대의 착각이었나.
글 / 사외독자 이성재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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