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나는 유난히 허약한 체질이었다. 외할머니께서 우리 집에 올 때는 옆집부터 들러서 내가 살아있는지를 물어보곤 했다니 어떤 상태였는지 짐작이 가리라. 게다가 잦은 배앓이로 방안을 뒹굴기 일쑤였다. 더러는 벽장 속 깊이 숨겨둔 꿀이나 곶감을 먹고 싶어서 꾀병 앓이를 할 때도 있었지만 진짜로 아파서 뒹굴 때가 더 많았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어디 보자. 내 손이 약손이제.”하시며 배를 문질러 주시곤 했는데, 그러면 신기하게도 통증이 씻은 듯 사라져 버렸다.
머리도 자주 아팠는데, 천장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지독한 두통이었다. 이럴 때의 할머니는 평소와는 다른 무서운 얼굴로 변했다. 나를 마당 한가운데 무릎 꿇게 하고는 한 손에 부엌칼을, 다른 손에는 음식이 담긴 바가지를 드셨다. 음식물을 휘저은 칼로 머리 위를 왔다 갔다 하시면서 “훠이, 훠이, 귀신아. 이 밥 먹고 썩 물러가라.”며 고성으로 주술을 외웠다. 그리고는 칼끝이 대문 밖으로 향할 때까지 몇 번이고 칼을 던지곤 했다.
칼국수나 수제비도 할머니의 손을 거치면 굉장한 맛이 났다. 그 비결은 알 수 없었지만 양념보다는 음식은 만드는 손에서 우러나는 손맛 때문인 것 같았다. 고된 밭일에다가 누에를 쳐서 명주실을 뽑고 삼베를 짜느라 거칠 대로 거칠어진 데다가 핏기마저 없이 깡마른 손에 무슨 괴력이 있어서 그와 같은 신기를 보였던 것일까?
얼마 전, 나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사람의 손에서는 일정량의 방사선이 방출되는 게, 그것이 음식을 맛있게 하고 간단한 병도 고칠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손으로 반죽해서 만든 칼국수나 수제비가 기계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보다 맛이 나는 것도 그 때문이라는 얘기였다. 특히 오른손과 왼손에는 교감 신경과 부교감 신경이 있어 두 손을 비빈 후 통증이 있는 부위를 만지면 탁월한 효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의 진의를 떠나, 어쨌든 할머니의 능력은 초월적인 데가 있었다.
할머니는 시간만 나면 장독에 마련된 정화수 앞에서 치성을 드리는 일도 잊지 않으셨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우리 가족 화목하여 백 년 천 년 복되기를 두 손 모아 비나이다.” 할머니의 주문은 주로 이렇게 시작되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달라지기도 했다. 집안에서 일어난 변고나 대소사의 형통을 빌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의 장래를 위한 축원도 빠지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지금까지 큰 병 없고 직장생활과 사회활동도 무난히 하였으니, 그저 고맙고 황송할 따름이다.
어렸을 적 나는 할머니의 품속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의 품속에 안기기만 하면 이상하게도 평온함이 느껴졌다. 더구나 나를 재우기 위하여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는 전래동화를 들려주시거나 흥타령이라도 하면 나는 이내 그 가락에 빠져들어 동화 속의 왕자가 되기도 했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생각하면, 할머니의 손은 약손이 아니라 사랑의 손이었다. 나는 언제쯤이면 할머니처럼 따스한 손을 가져 사랑을 전수할 수 있을까? 오늘따라 유난히 가냘프게 보이는 내 손이 부끄럽게만 여겨진다. 할머니! 당신과 같이 한 어린 시절이 한없이 그립습니다.
글 / 사외독자 이종철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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