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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요리와 친해지기

[와인과 친해지기] 세게지오 진판델 (Seghesio Zinfandel) (미국 레드와인)

by 앰코인스토리 - 2016. 6. 29.

▲ Zinfandel grapes

사진출처 : https://goo.gl/Aj5Cjr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포도 품종은 우리가 잘 아는 카베르네 소비뇽이 아니라 바로 진판델 (Zinfandel)이라는 적포도 품종이다. 이 포도는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아주 잘 자라는데, 그래서인지 잼처럼 달콤하고 과일처럼 풋풋한 특징으로 알려져 있으며 알코올도수가 높은 것이 특징이다. 진판델 포도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아주 최근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고 캘리포니아에 널리 심은 1800년대 중반에는 미국 토착품종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캘리포니아 기후에 너무나도 잘 자랐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UC Davis 대학 교수가 이탈리아를 여행하다가 이탈리아 포도품종인 프리미티보 (Primitivo)와 진판델의 유사한 특징을 발견한 후에 진판델 포도의 기원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많은 학자가 이탈리아를 방문한 결과, 프리미티보가 진판델 포도와 연관이 있다고 결론지었지만 여전히 소수 과학자는 계속 의문을 품었다. 최근 DNA 검사 기술이 더욱 발전하였고, 진판델은 결국 포도의 왕국 프랑스나 이탈리아, 스페인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포도가 아니라 전혀 예상치 않았던 나라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난 품종이라고 밝혀졌다. 진판델 품종으로 만드는 와인 중 인기 있는 타입은 화이트 진판델과 올드바인 진판델이다.


사진출처 : http://goo.gl/c87UrV


화이트 진판델은 로제와인처럼 분홍빛이 도는 것이 특징이어서, 미국에서는 블러쉬 와인 (Blush, 볼이 빨갛게 되는)으로 불리기도 한다. 화이트 진판델은 우연한 사고에서 만들어진 와인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와인회사에서 진판델을 발효 통에 가득 넣고 발효를 시키는데, 나중에 통을 열고 확인해보니 발효가 중단되어 있었다고 한다. 드라이한 레드와인을 만들어야 하는데 냉각기가 고장 나는 바람에 그 역할을 하는 효모가 죽어버려 발효가 중단된 것이었다.

와인 제조업자는 그 와인을 버리기도 아깝고 그렇다고 해서 레드와인도 아닌 와인을 팔기도 어정쩡해서 고민이었는데 뜻밖에 달달한 맛이 매우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와인 이름을 화이트 진판델로 명명하고 시장에 내놓았는데 그 반응은 생각보다 뜨거워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발견(?)된 화이트 진판델은 미국인들이 여름 휴가지에서 가장 많이 즐겨 찾는 와인이 되었다.

더운 여름이 지속되는 필리핀에서도 화이트 진판델 와인을 쉽게 구할 수 있다. 베린저 (미국의 가장 유명한 와이너리 중 하나)에서 나오는 화이트 진판델은 누구나 좋아할 만한 와인. 신선한 딸기 향이 후각을 자극하고 약간의 산도가 그 청량감을 더해주니 여름 휴가철 계곡이나 바닷가에 한 병 가지고 가서 시원하게 마신다면 행복한 기분이 배가 될 것이 틀림없다.



다른 하나의 가장 인기 있는 진판델 타입은 바로 올드바인 진판델이다. 수령이 50년 이상인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진판델 포도로 만든 와인인데, 복합적인 맛과 집중감으로 다른 와인들보다 많은 인기를 얻는 중이다. 세계에 100년 이상 된 포도나무가 많이 존재하는 곳은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구대륙이 아니라 호주나 미국 같은 신대륙이다. 이는 19세기 후반 필록세라(포도나무 진드기의 일종)가 유럽을 휩쓸어서 포도나무가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였으나 신대륙은 그 재앙을 피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소노마 밸리(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와인산지)에 있는 세게지오(SEGHESIO) 와이너리에서 만든 올드바인 진판델이 유명하다. 창업자가 이탈리아에서 건너와 심은 포도나무에서 아직도 포도가 열리고 100년이 넘은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을 맛본다는 것 그 자체가 어마어마한 시간여행이 아닐 수 없다. 오래된 포도나무에서는 적은 수의 포도송이만 만들어진다. 100년 동안 자연이 주는 혹독한 시련을 이기고 뻗은 뿌리에서 빨아올리는 양분으로 키워낸 소량의 포도로 만든 와인. 그런 와인을 맛보는 것 자체가 참 행복한 경험일 것이다.


필리핀에 와서 매주 거의 한 번씩은 들리는 단골가게에서 세게지오 와인 시음회를 한단다. 진판델 와인을 여러 번 만나봤지만 진득하고 달달하여 크게 매력적인 와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많았지만, 진판델 와인으로 유명한 세게지오 와이너리의 와인들, 특히 창업자가 120년 전에 심었던 바로 그 포도나무에서 열리는 포도로 만들었다는 홈 랜치(Home Ranch) 진판델 와인이 무척 궁금해져 참가하게 되었다. 세게지오에서 만든 총 다섯 가지 와인을 선보였는데, 피노 그리지오 품종, 산지오베제 품종의 와인이 각각 1병씩 나왔고, 진판델로 만든 와인은 진판델 소노마 (Zinfandel Sonoma), 올드바인 (Zinfandel Old Vine, 평균 수명 70년 이상인 포도나무에서 수확), 홈 랜치 (Home Ranch, 120년 된 포도나무에서 수확)가 나왔다.



모두 괜찮은 와인이었지만 특히 홈 랜치는 꼭 한 번은 맛봐야 하는 와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 진판델 와인에서 느꼈던 캐릭터라기보다는 위대한 와인에서 느낄 수 있는 복합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 스피노자가 “비록 내일 세계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고 했는데 사과보다는 차라리 진판델 포도나무를 심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재미있는 생각도 가져본다. 보통 포도나무는 20년이 지나면 노년기로 접어든다고 하지만, 진판델 포도나무는 30년이 지나야 청춘이고 100년이 지나도 살아남아 열매를 맺고 또 그 열매로 만든 와인을 수십 년 보관이 가능하니, 이보다 더 후세에 길이 남을 선물이 어디 있단 말인가.


▲ 1910년과 1976년에 심은 진판델 포도나무

사진출처 : https://goo.gl/upq8X3




WRITTEN BY 정형근

우연히 만난 프랑스 그랑크뤼 와인 한 잔으로 와인의 세계에 푹 빠져들었다. 주위에 와인 애호가가 늘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으로 사보에 글을 연재하게 되었으며, ‘와인에는 귀천이 없다.’라는 마음으로 와인을 신중히 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