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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일상다반사

[에피소드] 내 나이가 어때서


시도 때도 없이 8, 9, 10을 떠올리며 가신 분들을 그리워하는 횟수가 늘어만 간다. 고모, 아버지, 어머니가 하늘나라로 가신 후 흘러간 햇수가 8, 9, 10년이다. 거기다가 동년배인 건강전도사가 졸지에 사라진 것에 대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5공 시절 대통령을 닮았다는 배우도 속절없는 세월 따라 이승을 등지고부터는 부쩍 신문의 부고란에 눈길이 머문다. 그래서인지 무언가에 쫓기는 꿈을 자주 꾼다. 세월에 등 떠밀리다 보니 힘도 부치고, 생계에도 적신호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얼굴은 맑아 보였지만 주름살도 많아졌고 이마는 더 훤칠해졌으며 머리카락은 눈이 내린 것처럼 새하얗다. 모든 것을 받아들일 것 같은 흰색의 깊이에 신뢰가 간다. 나도 그렇게 늙고 싶었는데…. 젊음을 가장하지 않고, 나이 듦을 부끄러워 않고, 억새 우거진 가을 언덕처럼 백기를 휘날리며 항복하고 싶었는데….


염색을 시작한 지가 한참이 되었는데도 이발소에 갈 때마다 생각이 많아진다. 왜 염색을 하려 하는가. 희어지면 희어지는 대로 주름지면 주름 잡히는 대로 왜 덤덤히 살아내지 못하는가. 조금이라도 젊어 보이고 싶어서인가. 보다 활기차게 보이고 싶어서인가. 그렇다고 얻어질 게 무엇인가.

흰머리를 감추면 확실히 나이보다 덜 들어 보이기는 한다. 한 5년쯤 밑으로 보이도록 눈속임을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익숙해지니 염색을 안 하면 오히려 5년쯤 손해 보고 사는 느낌이 든다. 그게 본래의 모습이니 억울할 것도 없는 데 말이다. 그러니까 염색은 남을 속이기에 앞서 나를 속이기 위한 일 같다. 늙어가는 내 모습을 나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세상이 나를 돌려놓기 전에 내가 먼저 주눅이 들어 돌아앉을까 겁이 나서, 주름살도 흰머리도 기를 쓰고 감추려는 것이다. 무언가에 쫓기는 내 마음을 감추려고 안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젠 기를 쓰고 매달리던 마지노선까지 무너지는 것 같아 가슴이 저리다. 재작년에 정부로부터 경로 우대증을 받았지만, 전철의 노약자석으로 가는 것을 가급적 피했다. 염색을 하고 골프 모자를 눌러쓰면 젊은 사람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즈음은 벌떡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하는 젊은이가 늘어나고 있어 나를 슬프게 한다. 하기는 뭐 그렇게까지 결벽하게 몰아붙일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나에게 속아주지 않으면 누가 내게 속아줄 것인가.


턱을 깎고, 가슴을 치올리고, 보톡스로 주름살을 편 여자도 제가 한 일을 깜박 잊고 제 미모에 반해 살아가지 않던가. 숨겨진 도토리를 찾지 못한 청솔모들 덕분에 동네 뒷산이 푸르러지듯, 제가 해놓고 제가 속는 여자들의 탁월한 건망증 덕분에 세상이 젊어지고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닌가.

“야~야~야~내 나이가 어때서~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유행가 가사처럼 아직은 괜찮은 나이가 아닌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인생은 생각하기 나름이지.


글 / 사외독자 이종철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