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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일상다반사

[에피소드] 지구가 둥글잖아요


지난번 딸네 집에서 만난 손자에게 봉투를 내밀면서 말했다.

“이 돈 가지고 맛있는 것 사 먹고 할아버지한테 얘기해줄래?”

노란색 할머니를 세어보더니 금방 얼마인지를 알아차린다. 올 초 ‘모두의 마블’이라는 장난감을 사주었더니 올 때마다 보따리를 싸와서는 시도 때도 없이 성가시게 한다. 손자는 아들과 며느리하고도 가끔 즐기기 때문에 규칙을 줄줄 외우는 터라 자주 헷갈리는 내가 밥이 된다. 한번 게임을 하는데 1시간 반이 걸리므로 시간 보내기에 그만한 놀이가 없는 데다가 게임 진행을 돈으로 환산하기 때문에 5개월이 지난 요즈음은 할머니보다 계산이 빠르고 정확하다.

“한국 돈을 거기 가서 어떻게 쓰라는 거야?”

“엄마가 바꾸어 줄 거야.” 

“할아버지 선물은 뭐로 사 올까?” 

“내 것은 안 사도 되지만 친구들과 동생 것은 사야지.”

“동생은 젤리 사주기로 했고, 선물할 친구들은 벌써 적어놓았어요.”

내년에 초등학생이 될 손자는 2년 전에 싱가포르를 다녀왔고, 이번에는 9일 일정으로 미국에서 교수로 있는 이모한테 놀러 간다. 내 시대와는 모든 게 천양지차로 변했기에 여행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내가 처음 영국으로 해외출장을 간 70년대는 반공방첩이 국시였기에 본가는 물론 처가까지 경찰서에서 신원조회를 나왔다. 중국 연변에 언니(장모님이 초청하여 왕래하다가 지금은 아들딸 가족까지 수도권에서 잘 살아가고 계신다)가 사는 장모님께서는 가슴앓이를 한 나머지 조사 나온 경관에게 닭을 잡아주고 봉투도 준비했음을 여행을 다녀온 몇 년 후에야 알았다. 손자가 미국에 가 있는 동안에도 카카오톡으로 통화할 수 있었기에 마음이 편했다. 며느리는 시차 때문에 며칠간은 정신을 차리기조차 힘들었다는데도 손자 목소리에는 에너지가 철철 넘쳤다.


귀국한 지 달포 만에 손자가 내게는 17년산 밸런타인을, 할머니에게는 화장품을 가지고 나타났다. 얼굴을 만져보고 가슴에 코를 대어 보면서 말했다.

“승하야. 미국서 무엇을 먹었는지 맞춰볼까? 킹크랩, LA갈비, 버거킹….”

“버거킹은 아니고, 만두처럼 생긴 멕시코 음식이 제일 맛있었어요.”

옆에서 며느리가 말한다. “승하야, 버거킹도 먹었잖아.”

손자가 오기 전, 이 녀석이 머물거나 거쳐온 곳마다 추억이 될 이야기를 공유하고자 항공사 사보에 붙어있는 세계지도에다 손자가 여행한 코스는 빨간색으로, 같은 시기 사위가 영국과 미국을 다녀왔기에 파란색으로 내가 다섯 번 다녀온 코스는 검은색 볼펜으로 선을 그어놓았다.

“승하는 서울서 출발해서 LA에서 디즈니랜드를 구경하고 이모와 같이 댈러스를 거쳐 루이지애나를 다녀왔지. 세 곳을 다녀온 셈이네.”

이모는 LA에 세미나 참석차 와 있었다.

“디즈니랜드에서는 굴속에 들어가니 킹콩이 나타났는데 무섭기는 했지만 그게 제일 좋았어요. 댈러스에서는 밖에 나가지 않았으니 세 곳이 아니고 두 곳을 다녀온 거야.” 

파란색 선을 손으로 짚어가면서 그런다.

“고모부는 영국에서 미국으로 갔다가 왔기에 엄청 멀리 돌아왔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지도를 유심히 들여다보고는 양손으로 둥글게 말아 쥔다.

“할아버지, 지구는 둥글잖아요. 런던에서 LA까지는 가깝거든요.”

내가 설명할 것을 손자가 해주고 있으니 ‘내가 바보가 된 건가, 손자가 똑똑한 것인가?’


글 / 사외독자 이종철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