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어느덧 무더운 계절인 여름이 다가왔다! 한없이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7월. 지친 몸과 마음을 다독여줄 수 있는 맛있는 음식으로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니, 머릿속에 번뜩 떠오르는 맛집이 있었다. 참숯 직화구이로 고기를 구워내고, 거기에 샐러드 바를 무한으로 즐길 수 있는 첨단의 ‘웰빙통바베큐’!

 

 

들어가는 입구부터 참숯에 구워내는 초벌구이 고기 향기로 침을 꼴깍하고 삼키게 한다. 도출된 지 3일 이내의 최고 등급인 국내산 암퇘지 고기만을 사용한다. 우선, 이 집의 주요 메뉴인 통삼겹을 주문하고는 자리에 앉을 틈도 없이 냉큼 무한 샐러드 바로 달려간다.

 

 

쌈 채소부터 오이 냉국, 콘샐러드, 소시지 등등 알차게 만들어진 샐러드 바에서 접시 한가득 담아도 부담이 전혀 없다. 자꾸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그리고 기다림 끝에, 주메뉴인 통삼겹이 나온다. 초벌구이로 70% 정도는 구워져 나오기 때문에 조금만 더 익혀서 먹으면 되고, 고기 맛을 더해주는 파슬리가 솔솔 뿌려져 있으니 맛이 이리 좋을 수가 없다.

 

 

특히 참숯으로 초벌구이해서인지 고기를 소금장이나 쌈에 싸서 먹을 때마다 특유의 향이 배어난다. 씹을 때마다 껍데기의 쫀득거림과 부드러운 육즙이 입안에 감도니, 파도가 밀려와 바위에 철썩 부딪치는 그런 기분이 이런 거구나 하고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 집만의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바로 후식 메뉴 중 하나인 복불복 주먹밥. 주먹밥 8개 중에 일부는 캡사이신이 들어갔으니, <1박 2일> 프로그램에서의 흥미진진하던 복불복 게임의 유쾌함을 따라 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먹는 즐거움과 유쾌함, 그리고 무한이라 가격 부담이 없는 웰빙통바베큐! 적극적으로 추천해본다.

 

 

가격 : 통삼겹 29,000원(600g)/44,000원(1kg)
        통목살 29,000원(550g)/47,000원(1kg)
        통갈비 29,000원(550g)/49,000원(1kg)
        통갈매기 29,000원(550g)/47,000원(1kg)
위치 : 광주 광산구 첨단중앙로106번길 60 (월계동 892-2번지)
영업시간 : 16:00~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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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계탕이나 닭볶음탕은 너무 부담스러울 때, 소박한 저녁 밥상에 올리기 딱 좋은 닭고기 찌개다. 고기와 채소가 듬뿍 들어 있어서 찌개 하나만으로도 풍성한 느낌이다. 떡을 넣었더니 건져 먹는 재미까지!

 

4인분


필수 재료 >
무(2/3토막=100g), 다시마(1장=10x10cm), 닭고기 토막 낸 것(1/2마리=500g), 감자(1개),

애호박(1/3개), 대파(20cm), 양파(1/2개), 떡볶이 떡(100g)

 

고기 삶는 재료 >
대파 파란 부분(20cm), 마늘(1쪽), 생강(1쪽)

 

양념 >
고춧가루(1), 국간장(1.5), 고추장(2), 다진 생강(0.3), 소금(약간), 후춧가루(약간), 다진 마늘(1)

 

# 재료에 들어가는 괄호 안 숫자는 밥숟가락과 종이컵 기준!

 

 

매운 닭고기 찌개 만들기

 

1. 무는 큼직하게 썰어 다시마와 함께 물(5컵)에 넣고, 불에 올려 끓기 직전 다시마는 건지고 무는 10분간 더 끓여 건진다.

 

 

2. 끓는 물에 닭고기와 고기 삶는 재료를 넣어 3분간 삶는다.

 

 

3. 감자와 애호박은 도톰하게 반달 썰고, 대파는 어슷 썰고, 양파는 굵게 채 썬다.

 

 

4. 무 육수(4컵)에 고춧가루(1), 국간장(1.5), 고추장(2)을 넣은 뒤 닭고기, 감자를 넣어 끓인다

 

 

5. 거품을 걷어내고 다진 생강(0.3)을 넣고 호박, 양파, 떡을 넣어 끓인다.

 

 

6. 소금과 후춧가루로 간을 하고 다진 마늘, 대파를 넣고 한 번 더 끓여 마무리한다.

 

 

※ 자료제공 : 이밥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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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들이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여름휴가철이 다가온다. 캠핑이 지금처럼 유행하지 않았던 5년 전, 설악산 진부령 초입에 있는 소똥령이란 곳으로 휴가를 떠났었다. 고개만 넘으면 동해도 있고 설악산도 있어서 선택했던 곳인데, 마을 입구에는 멋진 계곡이 있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마을 주변을 둘러보았다. 맑고 시원한 물이 흐르는 계곡 옆에 텐트와 그늘막을 멋지게 설치하고 그 아래 간이침대에서 여유롭게 책을 읽고 있는 부부를 보았다. 없는 물건이 없을 정도로 잘 갖춰놓은 도구들을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아이들은 계곡에서 물고기를 잡거나 수영을 하면서 놀고, 배가 고프면 텐트로 돌아와 맛있는 간식을 먹고, 숯불을 피워 바비큐 파티를 하고, 밤이 되면 모닥불을 피워놓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여름휴가! 모든 것이 갖춰진 리조트나 펜션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자연과 함께하는 경험이 두고두고 소중한 추억의 한 장면으로 남을 것 같았다. 필자도 그 후로 텐트를 구매하긴 했지만 몇 번 사용도 못 해보고 그만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 Piper Heidsieck

 

혹시 이번 여름휴가 때 캠핑을 계획한다면, 저녁 메뉴와 어울리는 와인을 준비해서 가져가 보자. 마트에 가서 직원에게 바비큐 고기 종류를 알려주면서 와인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친절한 설명과 함께 여러 와인을 소개해 줄 것이다. 그중에 가격을 비교해 마음에 드는 와인으로 고르면 된다. 숯불구이 바비큐가 소고기라면 묵직한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이나 말벡(Malbec) 품종의 레드와인을, 삼겹살 구이라면 산도가 있는 이태리 키안티 와인(Chianti Wine)이나 거친 맛이 있는 샤도네이(Chardonnay) 화이트와인을 매칭시키면 좋다.

 

ⓒ Bohigas

 

날이 더워지면 레드와인보다는 차갑게 해서 마시는 화이트와인이나 거품이 나는 스파클링 와인(Sparkling wine)을 많이 찾는다. 우리에게 아직 생소하지만 스페인산 스파클링 와인 카바(CAVA)는 잘 고르면 가격대비 만족도가 높고, 특히 삼겹살 구이나 회 같은 수산물에도 무난하게 잘 어울려서 음식과 잘 어울리니 휴가를 떠날 때 한 병쯤 챙겨가도 좋을 것 같다.


“어떤 와인을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 “샴페인이요.”라고 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와인 고수일 것이다. 흔히 와인을 좋아하는 단계가 있다고 한다. 달콤한 와인을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와인에 눈을 뜬 후, 묵직하고 드라이한 와인을 좋아하다가 섬세한 차이를 내는 피노 누아(Pinot Noir, 스페인어로는 피노 누아르) 품종으로 만든 와인을 거쳐서 샴페인으로 간다고 말이다. 즉, 샴페인이 와인의 정점에 있는 것이다.


보통 거품이 나는 화이트와인을 샴페인이라고 부른다. 법적으로는, 프랑스 샹파뉴(Champagne) 지역에서 만든 와인만을 샴페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 외 프랑스에서 만드는 와인은 ‘크레망(Crement)’이라고 한다. 이탈리아에서 만든 스파클링 와인은 스푸만테(Spumante), 스페인은 카바(Cava), 독일은 젝트(Sekt),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에서는 스파클링 와인이라고 부른다.


1차 발효가 완료된 와인 병 속에 이스트나 당분을 첨가해 다시 발효를 시키면 탄산가스가 생성되고 와인에 녹아든다. 가스에 인한 압력이 상당하므로 병도 두껍고 코르크가 튀어 나가지 못하게 쇠고리가 달린 병마개로 봉인되었다. 코르크를 제거할 때 제거된 코르크가 총알처럼 날아가서 주위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으니, 왼손으로 병 목 부문을 꽉 잡아 테이블에 누르고 오른손으로 코르크를 서서히 위로 돌려가며 딴다.

 

샴페인의 종류

 

* 빈티지 샴페인 (Vintage Champagne) : 수확이 뛰어난 해의 포도를 적어도 3년 이상 숙성시킨 다음 만든 것. 샴페인을 선물 받았는데 생산연도(빈티지)가 적혀있으면 귀한 것이라고 봐도 된다.
* 논 빈티지 샴페인 (Non-Vintage Champagne) : 두세 개의 빈티지를 블렌딩해서 만든 것으로 전체 샴페인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 로제 샴페인 (Rose Champagne) : 소량의 레드와인을 첨가했다.
* 블랑 드 누아 샴페인 (blanc de noirs Champagne) : 적포도 품종인 삐노 누아로 만들어졌다.
* 블랑 드 블랑 샴페인 (blanc de blancs Champagne) : 청포도인 샤르도네 품종으로만 만들어졌다.

 

만약 레이블에 ‘브뤼(Brut)’라고 쓰여 있다면 ‘달지 않다’는 뜻이다.

 

샴페인 중에 추천할만한 와인으로는 다음과 같다.

 

 

파이퍼 하이직, 퀴베 브뤼 (Piper Heidsieck, Cuvee Brut)

 

ⓒ Piper Heidsieck


마릴린 먼로는 “나는 샤넬 No.5를 입고 잠이 들고, 파이퍼 하이직 한 잔으로 아침을 시작한다.”라고 했다. 샴페인으로 목욕할 정도로 파이퍼 하이직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고 한다. 해서 ‘먼로 와인’으로 통한다. 빨간색 라벨이 감각적으로 다가오고, 생각보다 맛도 강렬하다. 가격은 할인 가격으로 5만 원 대인데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모엣&샹동, 돔 페리뇽 (Moet&Chandon, Dom Perignon)

 

 

ⓒ Moet&Chandon


샴페인의 원리를 발견한 수도사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라 샴페인 이름을 지었다. 샴페인 중 최고라고 꼽는 데 있어서 주저함이 없는 와인이다. 오래전, 와인 모임 송년회에서 2002 빈티지 돔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섬세한 기포와 잘 말린 볏짚 향이 인상적인 와인이었다. 최고의 순간을 축하하는 와인으로 추천한다. 가격은 뭐랄까. 많이 비싸다.

카바 중에는 이 와인을 추천한다.

 

 

보히가스, 브륏 리제르바 (Bohigas, Brut Reserva NV)

 

ⓒ Bohigas


보통 카바는 저급 스파클링 와인으로 취급당하기 일쑤다. 피노 누아나 샤도네이처럼 국제적인 품종을 사용하지 않고 스페인 토착 화이트 품종을 섞어서 만들어, 톡 쏘고 거칠게 들이대기 때문이다. 필자가 추천하는 이 와인은 데일리급 카바(20불 이하)를 로버트 파커가 직접 테이스팅하는 것도 드물지만 무려 90점이라는 놀라운 점수를 받은 와인이다. 잔잔한 기포, 적당한 산도와 과실 향이 인상적이다. 벌써 두 번째 만났는데 가격 대비 참 괜찮은 와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할인 가격으로 19,000원 정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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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하면 나이 드신 부모님들 세대들은 베트남전을 생각하겠지만, 요즘 젊은 세대는 베트남 쌀국수를 떠올린다. 격세지감을 이럴 때 쓰는 표현인 듯하다. 필자도 개인적으로 베트남 쌀국수를 매우 좋아한다. 5년 전, 여름휴가 때 베트남에서 일주일 동안 여행하면서 하루 세끼를 전부 베트남 쌀국수로 해결할 정도로 많이 먹었지만 전혀 질리지 않았다. 베트남에 다녀온 이후에도 마니아가 되어서 자주 찾아가 사 먹는 편이다.

 

 

얼마 전, 부평에 새로 생긴 베트남 쌀국수 식당이 있어 웹 서핑을 해보니 후기가 좋아서 주말에 가족들과 함께 방문했다. 일단 위치는 부평역 근처. 도로변 건물 2층에 있기에 찾기가 쉽다. 테이블이 12개 정도 있는 보통 규모의 식당이었고, 깔끔한 인테리어가 인상 깊다. 젊은 부부가 운영하고 직원들도 매우 친절했다. 이른 시간부터 손님도 많으니, 식사 시간 때는 일찍 오는 것이 좋을듯하다.

 

 

먼저 쇠고기 베트남 쌀국수를 주문해 본다. 주문과 동시에 바로 요리가 나온다. 베트남 본토에서 느껴본 그 향기가 확 퍼지면서 필자의 식욕을 확 자극했다. 바로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먹어보니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만든, 진한 육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인 부부가 직접 주방장에서 끓여낸다고 한다. 그렇게 내온 육수는 깔끔하고 매콤하면서도 전혀 느끼하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푸짐한 건더기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보통은 양이 많으면 맛이 별로 거나 멋이 좋으면 양이 적은 경우가 다반사인데, 이곳 음식은 양과 맛이 모두 만족스러웠다.

 

 

맛은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고 조미료 맛이 강하지 않았다. 뭐랄까. 혀에서 착 끝내는 맛이 좋다고나 할까. 추가로 주문한 스플링 롤도 주문 즉시 만들기에 재료가 매우 신선했다. 맛도 가격도 좋고 부평에서 이 정도는 절대 흔치 않다고 자부한다. 점심시간이면 크지 않은 내부가 항상 만원이다. 이번 주말에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진한 육수가 끝내주는 베트남 쌀국수 한번 즐겨보시길!

 

 

가격 : 쇠고기 베트남 쌀국수 S 6,900원 / L 9,900원
        얼큰 쇠고기 쌀국수 S 6,900원 / L 9,900원
        닭고기 베트남 쌀국수 S 6,900원 / L 9,900원
        해산물 베트남 쌀국수 S 6,900원  / L 9,900원
위치 : 인천 부평구 시장로 23 (부평동 193-5) 2층 더파타이 부평점
영업시간 : 10:00~23:00 (연중무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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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는 왠지 사나이, 동양인, 무공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나 통할 것 같은 단어다. 서구 유럽에서 의리를 찾아본다면 역시 ‘기사도’ 같은 케케묵은 개념들만이 떠오를까. 근현대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꼽히는 카를 마르크스와 그의 동반자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교우는 의리의 새로운 표본으로 읽힐 것 같다.

 

요즘 의리의 상징으로 모 남자탤런트가 떠오르듯이, 역사에서도 ‘의리’ 하면 ‘이 사람!’하고 떠오르는 인물이 있을까. 단연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년~1895년)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역사에서 의리란 대개 주군과 신하 간에 지켜져 왔다. 권력 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사람이 지키는 경우보다 아랫사람이 바치는 조건 없는 충성이 절대적으로 많았다. 피를 나눈 사이가 아님에도, 평등한 관계임에도 의리를 지켰던 사람은 상대적으로 찾기가 힘들다. 여기 카를 마르크스의 친구이며 그 자신이 위대한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소개한다.

 

▲ <사진1> 좌: 엥겔스 / 우: 마르크스출처: www.fridge.gr


엥겔스는 독자적으로 소개되는 법이 거의 없고, 카를 마르크스의 친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엥겔스는 마르크스와 더불어 보통사람의 입에 담기 어려운 이름이기도 했다. 지금이야 두 사람의 공동 저작인 「공산당 선언」이 대학 교양수업 교재로도 쓰이는 세상이지만 ‘민주’보다는 ‘반공’이 중요했던 시기에는 엥겔스와 마르크스를 입에 올리는 일이 금기시되었다. 우리나라의 분위기와는 별개로 마르크스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사상가이자 역사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일례로, 지난해 11월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학자들의 영향력을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는데, 그 1위를 역사학 분야에서 카를 마르크스가 차지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공동 연구자이자 동료 활동가였으며 마르크스의 사상을 정리하고 전파한 인물이다. 정치적 편향을 제거하고, 그의 생애를 따라가 보려 한다.



방직회사 경영주의 아들


엥겔스는 1820년 독일 라인 주에서 태어났다. 알려졌다시피 그의 아버지는 방직회사 ‘에르멘&엥겔스’를 경영하는 자본가였다. 아들이 대를 이어 경영에 뛰어들기를 원했기에, 엥겔스는 아버지 뜻에 따라 브레멘 상사라는 회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경영기술보다 노동자들이 고통받는 현실을 먼저 발견했다. 17세에 시집을 낼 정도로 글재주가 좋았기에 엥겔스의 손을 거쳐 당시 독일 사회를 고발하는 칼럼들이 쏟아져 나왔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엥겔스는 유명한 저널리스트로 인기를 끌었다.

스무 살이 넘은 1841년, 엥겔스는 베를린에서 포병연대에 지원했고, 군 복무를 하면서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청강했다. 200여 년 전 독일에서는 학자와 자본가의 길이 다르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엥겔스는 대학준비과정, 우리 식으로 하면 고등학교쯤에 해당하는 김나지움(Gymnasium)을 중퇴하고 회사에 다닌 터였다. 군 복무를 다 마치고 나서 엥겔스가 간 곳은 산업화가 한창 진행 중이던 영국 맨체스터였다. 맨체스터에는 에르멘&엥겔스의 영국 지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영기술은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이때의 경험과 연구로 나온 것이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1845)라는 역작이다.
 

 

 

카를 마르크스와의 역사적 만남

 

▲ <사진2> 칼 마르크스

ⓒ WikiMedia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첫 만남은 1844년 이루어졌다. 엥겔스가 독일로 돌아가던 길에 파리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오늘날에는 이 두 사람의 사상이 ‘마르크스주의’, 잘해봤자 ‘마르크스-엥겔스주의’로 불리지만 첫 만남에서 좀 더 명망 있던 사람은 엥겔스였다. 마르크스는 대학에서 철학과 역사학을 전공한 신출내기 학자라 할 수 있었고, 엥겔스는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저널리스트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공동저술은 기여도와 관계없이 엥겔스의 이름이 먼저 표기되기도 했다. 세간의 평가를 뒤로하고 엥겔스는 마르크스 앞에서 자신을 낮췄다. 마르크스는 악필로도 유명한데, 그의 글씨를 알아보는 사람은 엥겔스가 유일했기에 다시 베껴 쓰는 조수 역할까지 해야 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엥겔스야말로 진정한 ‘대인’이었다.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사상가이자 혁명가였다. 그들은 책만 쓴 것이 아니라 행동에 나섰다. 그들이 살았던 시기 유럽은 ‘1848년 혁명’을 겪고 있었다.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폴란드, 헝가리 등지에서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자신들과 비슷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조직하고, 유럽 여러 나라의 혁명에 관여했다. 특히 군 복무를 했던 엥겔스는 독일 남부 지역에서 무장투쟁을 하기도 했다. 무장투쟁이 실패한 이후에는 마르크스와 함께 영국 런던으로 거처를 옮겼다.

 

 

동지에 대한 아낌없는 지원

 

▲ <사진3>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동상

 ⓒ Bente Jensen


1850년 무렵 마르크스는 필생의 저작인 「자본 : 정치경제학 비판」, 다시 말해 「자본론」 집필에 들어간다. 동시에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방대한 학문적 작업을 마무리하도록 돕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선택했다. 망명 초기, 영어에 서툴렀던 마르크스의 글은 엥겔스의 번역이 있어야 했다. 학문적, 심리적 지원만이 아니었다. 재정적 어려움으로 맨체스터에 있는 방직공장으로 돌아간 엥겔스는 1869년 자신이 은퇴할 때까지, 그리고 1883년 마르크스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마르크스를 물질적으로 지원했다. 이후로는 친구의 자녀들을 돌봤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혁명적이었지만, 그 생활관념은 동시대인과 비슷했다. 마르크스는 아내 예니가 귀족 집안 출신인 것을 자랑으로 여겼고, 젊은 시절에는 부모 속을 썩이는 흔한 아들이었다. 또한, 자신의 자녀들이 교양 있는 상류 계층의 교육을 받기를 바랐다. 맨체스터의 엥겔스와 런던의 마르크스가 주고받은 편지글에서는 돈을 부쳐달라고 애원하며 가난과 질병을 호소하는 마르크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다행히 에르멘&엥겔스의 사업이 잘되었기 망정이지, 마르크스 가족의 생활비는 경영을 위협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마르크스 가족이 엥겔스에게 끼친 경제적 부담은 마르크스의 사상을 위험한 것으로 본 사람들에 의해 여전히 공격을 받는 부분이다. 그러나 엥겔스는 자신의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늘 후했다. 그것은 동정이 아니라 동지애였고, 엥겔스의 손길은 이민자와 사회주의자 등 당시 어려운 삶을 살던 사람들에게도 미쳤다.

 

 

세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

 

▲ <사진4> 프리드리히 엥겔스

 ⓒ WikiMedia


엥겔스가 다시 활발한 정치 활동을 재개한 것은 은퇴 후였다. 마르크스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유고를 정리해 출판하는 것이 엥겔스의 몫으로 남았다. 여러 나라의 공산주의자들은 엥겔스의 해석과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최초의 마르크스주의는 그의 친구 엥겔스가 만들고 퍼뜨린 사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력적으로 활동하던 엥겔스는 후두암에 걸렸고, 1895년 8월 5일에 영영 눈을 감는다. 자녀가 없던 그가 남긴 유언대로 유골은 화장되어 바다에 뿌려졌다.

 

너무 낡은 것처럼 들리는 단어, 오늘날에는 조직폭력배들이나 쓸 것 같은 의리가 2014년에 왜 이토록 유행일까.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는 누군가가 간절한 우리들의 외로움과 불안감 때문일까.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의리가 아니라 부당한 이익을 챙기는 협잡만이 판을 치는 사회상 때문일까. 목숨을 바친 사상과 평생을 지킨 의리가 아득한 전설처럼 느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글쓴이 김희연은 _ 사보와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자유기고가다. 사회, 문화, 경제 분야에 두루 걸쳐 갖가지 종류의 글을 쓴다. 글쓰기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행운을 얻어서 늘 고마운 마음을 품은 한편으로, 쓸데없는 글로 인해 웹이나 인쇄매체에 들어가는 종이와 바이트, 그리고 독자들의 시간을 낭비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 외부필자에 의해 작성된 기고문의 내용은 앰코인스토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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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놀랄 만큼 화려하고 다양한 빙수들이 있지만 클래식한 팥빙수야말로 명불허전. 무뚝뚝한 듯 기본을 지킨 빙수를 먹으면, 몸은 시원한데 마음은 이상하게 따뜻해진다. 금방 녹지 않도록 뚝배기에 담아 즐기는 팥빙수! 한 뚝배기 하실래예?

 

 

4 인 분 

필수 재료>
우유 (2컵), 인절미 (2개), 빙수용 팥 (1컵=250g)

선택 재료>
연유 (1), 슬라이스 아몬드 (2)


# 재료에 들어가는 괄호 안 숫자는 밥숟가락과 종이컵 기준!

 

 

 

뚝배기찰떡팥빙수 만들기

 

 

1. 우유는 각얼음통에 부어 얼리고, 인절미는 한입 크기로 썬다. 찹쌀떡을 사용해도 좋다. 뚝배기는 미리 냉동실에 넣어 차갑게 준비하자.

 

 

 

2. 우유얼음 (1/2컵 분량)을 빙수기계에 갈아 그릇에 담은 뒤 팥(1/2컵)을 올린다.

 

 

 

3. 다시 우유얼음(1/2컵 분량)을 갈아 올린 뒤 남은 팥(1/2컵)을 올린다.

 

 

 

4. 연유 (1)을 뿌리고 슬라이스 아몬드와 인절미를 올려 마무리한다.

 

 

 

플러스 레시피, 정성 두 숟가락 더한 빙수용 팥

 

팥빙수의 시작과 끝은 누가 뭐래도 맛있게 조린 단팥! 조금 수고롭지만 홈 메이드 단팥만 있으면 빙수에 맛과 정성을 듬뿍 더 할 수 있다. 시간만 지키면 그리 어렵지 않아요~!

 

 

필수 재료>
팥 (5컵=500g), 설탕 (1+1/3컵=200g), 소금 (0.5)

 

# 재료에 들어가는 괄호 안 숫자는 밥숟가락과 종이컵 기준!

 

1. 냄비에 팥을 넣고 물을 넉넉히 부어 10분간 삶은 뒤 첫물은 따라 버린다.
2. 물을 다시 넉넉히 붓고 중간 불로 삶아, 알갱이를 눌렀을 때 부드럽게 으깨질 정도로 익힌다.
3. 체에 걸러 팥의 1/2분량은 따로 덜어 으깬 뒤 다시 섞고, 삶은 물(1+1/2컵)은 남긴다.
4. 냄비에 삶은 팥과 남겨둔 삶은 물을 넣고 설탕, 소금을 넣어 설탕이 녹고 농도가 되직해질 때까지 조려 마무리한다.

 

 TIP  알갱이 없이 고운 팥을 만들고 싶다면 3번 과정에서 삶은 팥을 전부 으깨자.


 

※ 자료제공 : 이밥차


단순하고 직관적인 요리 설명과 레시피,
독자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한 저렴한 제철 재료,
밥숟가락으로 쉽게 계량하고 만드는 대한민국 1등 요리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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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명희 2014.07.01 14:2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맛있겠다ᆢ요즘 설빔카페라고해야하나ᆢ? !ᆢ대세더라구요ᆢ

어느 교과서나 위인전에도 빠지지 않는 인물을 한 명 꼽으라면 헬렌 켈러를 들 수 있다. 헬렌 켈러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시각과 청각장애를 극복한 여성이라는 점과 설리번 선생에게 말을 배운 일화들이 희미하게 기억날 것이다. 여기서는 좋은 동반자들과 인생을 보냈던 사람이자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고 했던 활동가로서 헬렌 켈러의 또 다른 모습을 소개한다.


ⓒ Litchfield Literary Books' Blog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 1880년~1968년)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삼중고에 시달렸던 장애인 여성이다. 우리가 아는 헬렌 켈러의 이야기는 설리번 선생을 만나 글을 배우는 데서 시작해 래드클리프 대학을 입학하는 데서 끝난다. 래드클리프 대학은 하버드 대학이 남학생만 받던 시절에 보완적 역할을 했던 여학교였기에, 어떤 어린이용 위인전에서는 아예 하버드대학교라 표기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는 어떻게 살았을까. 대부분 위인은 성인기의 업적에 따라 위인으로 불린다. 어린 시절에 천재였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위인으로 칭송받는 사람은 없다. 헬렌 켈러는 ‘미수(米壽)’라고 하는 88세까지 살다 갔다. 60년이 넘는 그녀의 진짜 인생은 어디로 갔을까. 비장애인의 일방적인 시선이나 학벌 중심 사회의 편견도 버려두고, 우리가 몰랐던 헬렌 켈러의 인생을 따라가 보도록 하자.



인형을 손바닥으로 느끼다


ⓒ New England Historic Genealogical Society


헬렌 켈러는 1880년 미국 앨라배마 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서 H. 켈러(Arthur H. Keller), 어머니는 케이트 애덤스 켈러(Kate Adams Keller)였다. 켈러 부부가 아이를 낳았을 때, 헬렌은 평범한 아기였다. 그러나 생후 19개월째에 성홍열과 뇌막염에 걸려 뇌와 위에 급성 출혈이 일어났다. 잠깐 스쳐 지나간 병이었지만 이때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를 가지게 된다. 그녀는 다행히 한집에 사는 요리사의 딸 마르타 워싱턴과 어울리며 자랐다. 마르타가 수화를 이해할 수 있었던 덕에 일곱 살 무렵에는 수십 가지의 수화를 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마르타와의 소통이 헬렌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켈러 부부는 딸의 장애를 알고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장애인 교육에 관한 책을 읽고, 전문가들을 만나러 다녔다. 장애는 고칠 수 없지만 그것을 딸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비장애인과 다름없이 교육하기로 결정한다. 수소문 끝에 펄킨스 시각장애학교를 졸업한 앤 설리번(Anne Sullivan, Johanna Mansfield Sullivan Macy, 1866년~1936년)을 가정교사로 받아들인다. 스무 살의 설리번 선생이 일곱 살의 헬렌을 만났고 둘은 50년 가까이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다. 첫 만남에서 설리번 선생은 인형을 선물하고 헬렌 손바닥에 인형이라는 뜻의 철자 ‘doll’을 적는 것으로 교육을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는 주변 사물들의 흐릿한 윤곽을 더듬으며 철자를 하나하나 손바닥으로 배웠다.

ⓒ Litchfield Literary Books' Blog


여기까지가 흔히 아는 헬렌 켈러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영화 <미라클 워커(The Miracle Worker)>의 인기가 큰 몫을 했다. 헬렌은 대학 시절인 1903년 「내가 살아온 이야기」라는 자서전을 썼다. 이것을 바탕으로 1959년 연극 <미라클 워커>(1959)가 나왔고, 그녀의 사후에는 이 연극을 각색한 동명의 영화가 1979년 상영된다. 영화는 TV용으로 다시 만들어져 1979년과 2000년에 방영되었다. TV영화는 우리나라 방송에서도 이따금 틀어주곤 한다.


동반자들의 헌신적인 조력


설리번 선생의 끈질긴 노력이 유명해지는 바람에, 마치 헬렌 켈러가 집에서만 교육받은 것처럼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쉼 없이 정규교육을 받았다. 1888년 만 여덟 살이 되자 설리번이 다녔던 펄킨스 시각장애학교에 등록했고, 6년 후인 1894년에는 라이트 휴머슨 청각장애학교와 호레스 만 청각장애학교가 있는 뉴욕으로 이사했다. 그 후 케임브리지 여학교를 거쳐 래드클리프 대학교에 다닌 것이다. 래드클리프를 졸업할 때 영어, 독일어를 포함해 5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설리번은 헬렌과 늘 동행했고, 교사로서가 아니라 동료로 남았다. 설리번의 남편 존 메이시까지 세 사람은 시각장애인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죽는 날까지 함께 활동했다.


ⓒ Litchfield Literary Books' Blog


1914년부터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설리번 선생은 1936년에 사망했다. 1914년부터 헬렌의 곁을 지킨 사람은 폴리 톰슨이었다. 처음에 톰슨은 집에서 그녀를 돌보는 역할로 고용되었으나 점차 시청각장애인에 대한 이해를 넓혔고 마침내 헬렌의 비서가 된다. 40년 가까이 그녀의 곁을 지켰고, 설리번 선생 이상으로 헬렌 켈러의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1957년 톰슨이 발작으로 몸져눕자 헬렌은 위니 코베리라는 간호사를 고용했다. 톰슨을 돌보기 위한 일이었지만 1960년 톰슨이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난 뒤에도 코베리는 계속 남아 그녀를 돌봤다. 헬렌의 마지막 10여 년은 코베리가 함께한 것이다.



여성, 노동자, 장애인과 함께한 인권운동가


ⓒ Litchfield Literary Books' Blog


헬렌 켈러의 인생 초반 20여 년보다 60여 년의 중후반이 거의 가려져 있던 이유는, 그녀의 직업이 인권운동가였기 때문이다. 회복할 수 없는 장애를 입은 미국 사회의 억압과 부조리를 고발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어떤 이들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헬렌은 전 세계를 다니며 민주주의, 여성주의, 사회주의를 설파하고 실천했다. 또한, 열두 권의 책을 쓴 작가이자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훌륭한 연설가이기도 했다.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3년 후, 미국은 뒤늦은 참전을 선언한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전 세계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독일에 선전포고한다.”라는 명분을 내세우자 헬렌 켈러는 반발하고 나섰다. “(미국 백인들이) 수많은 흑인을 학살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지배자는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녀야말로 평생을 여성의 선거권과 참정권, 노동 인권, 반전과 평화, 사형제 폐지, 인종차별 철폐,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


ⓒ Litchfield Literary Books' Blog


헬렌의 사회운동은 전쟁을 옹호하고 차별을 조장하는 사람들의 공격을 받았다. 이런 사람들은 장애인에 대한 왜곡된 편견을 그대로 드러냈다. 대표적인 비난은 ‘그녀가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민주사회의 시민이 자신의 주권을 행사할 때 배후 조종자가 있을 것이라 매도하는 경향은, 1900년대의 미국도 지금의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체적 장애보다 사회의 장애를 극복하는 데 더 큰 노력을 기울였던 헬렌 켈러. 헬렌은 1968년 정말로 눈을 감는다. 1961년부터 뇌졸중을 앓았던 그녀는 마지막까지 미국 시각장애인재단을 위해 일하고 떠났다. 헬렌 켈러는 인생의 동반자였던 앤 설리번과 폴리 톰슨 옆에 묻혔다. 그리고 눈 없이도 세상을 똑바로 보았고 청력이 사라져도 타인의 신음을 들을 줄 알았던 위대한 정신의 표본으로 우리 곁에 남았다.


ⓒ Litchfield Literary Books' Blog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은 보거나 만질 수 없다. 그것들은 가슴으로 느껴야만 한다.”
“혼자서는 약간의 일을 할 수 있다. 함께라면 우리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어둠 속에서 친구와 걷는 것이 환할 때 혼자 걷는 것보다 낫다.”
“나는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지만, 무엇인가는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할 수 없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글쓴이 김희연은 _ 사보와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자유기고가다. 사회, 문화, 경제 분야에 두루 걸쳐 갖가지 종류의 글을 쓴다. 글쓰기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행운을 얻어서 늘 고마운 마음을 품은 한편으로, 쓸데없는 글로 인해 웹이나 인쇄매체에 들어가는 종이와 바이트, 그리고 독자들의 시간을 낭비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 외부필자에 의해 작성된 기고문의 내용은 앰코인스토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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