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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레노리 노란 우체통6

[글레노리 노란 우체통] 블루도 힘이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플로리다,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면 넘치는 햇살에 딱딱하게 마른 열매들이 바닥에 뒹구는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 사진에서 보았던 구리빛 피부, 하얗고 부드러운 모래가 한없이 펼쳐진 해변 때문일까. 금방 짜낸 오렌지 즙이 담긴 주스 광고를 보고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가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황금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이국적인 풍경은 필시 TV 속에만 있는 유토피아일 것이라고 상상을 했었다. 그 플로리다에서 쓸쓸한 바람 한 줄이 불어왔다. 한 줌의 주저함조차 없이 지구 반대편까지 불어온 아침 전화, 급하고 급했나 보다, 받자마자 가라앉은 목소리가 바로 흘러나왔다. 등을 일으켜 머리를 묶고 커튼을 벽 쪽으로 밀었다. 창밖에는 녹색 잎사귀들이 거의 목까지 촘촘하게 차올랐다. 내가 사는 .. 2022. 12. 22.
[글레노리 노란 우체통] 멸치를 따라서 방바닥에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신문 몇 장을 폈다. 그 위로 다시 멸치 한 박스를 좌르륵 쏟았다. 모국에 왔다가 시드니로 돌아올 때마다 멸치 손질은 빠질 수 없는 출국 퍼포먼스가 되었다. 4년 전 봄에도 애써 발라가지고 온 두 뭉치의 멸치를 두고두고 잘 먹었다. 그때는 멸치 대가리가 버리기 아까워 따로 담아 가져왔지만 이번엔 포기했다. 공항 검역의 날카로운 눈에 괜한 시비 거리로 거슬렸다가는 자칫 몸통마저 잃을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딸아이랑 마주 앉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손만 바쁘게 움직였다. 무심한 척했지만 며칠 있으면 헤어지는 딸과 그동안 망설이며 못한 이야기가 맴돌고 있었다. 모녀의 속심이 어딘가에 꽂혀 있다가 날 것 그대로 뚫고 나와 찔린다 해도 이야기를 꺼내야만 했다. 심.. 2022. 11. 9.
[글레노리 노란 우체통] SOS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쥐를 본 적이 있다. 젊은 시절 친구 집 화장실 하얀 변기 속이었다. 엉겁결에 맞닥뜨린 일이라 난감해서 바라보다 그냥 돌아 나왔다. 그 이후로 내가 무슨 일로 허둥댈 때마다 그때가 생각나곤 했는데 오늘 공항에서 그 순간을 또 만났다. 한국으로 출국 한 시간 반을 남겨 두고 시드니 공항 데스크에서 출국 거부를 받았다. 아무리 발을 동동 굴려 봐도 소용없는 일, 한시라도 빨리 노트북을 펼쳐놓고 잘못된 서류를 다시 작성하는 방법밖에 별수가 없었다. 한국 무사증 입국 신청서가 거부당한 건 숫자 하나를 오기(誤記)한 탓이다. 동행한 남편 생일 끝자리가 4인데 14라고 써넣은 것이다. 여권 만기 날짜가 14여서 나도 모르게 같은 숫자로 눌렀던 모양이다. 눈과 손이 오작동을 한 셈이다. 급할수.. 2022. 9. 23.
[글레노리 노란 우체통] 팔월의 시인 나는 이 문장을 좋아한다는 서두로 그대의 안부를 묻기로 했다. “모든 건축가는 반드시 훌륭한 시인이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해 독창적인 해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한 말이다. 나는 여기에서 두 직업 즉 건축가와 시인의 독창적인 해석이라는 연결고리를 발견해보려고 한다. 관심이 컸던 단어의 조합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건축가는 훌륭한 시인이어야 한다는 말을 뒤집어, 시인 역시 훌륭한 건축가가 되어야 한다는 말에 방점을 찍고 싶었다. 독창성에 한해서는 오십 보 백 보일 것 같기 때문이다. 살고 있는 시대와 더불어 남다른 글 집을 짓고 있는 시인이라면 거기에 많은 독자들이 세 들어 살아왔을 것이다. 나 또한 누군가 지어 놓은 글 집에 거하며 자랐고 그.. 2022. 8. 18.
[글레노리 노란 우체통] 오전에는 쇼팽을 읽고, 오후에는 슈베르트를 산책했다 「가만히 듣는다」라는 책을 지난주에 읽었다. 서영처 작가의 책이다. 버블 껌 같은 분홍 책 커버를 열면 수많은 명곡과 천재 시인, 주옥같은 어록이 곳곳에서 들린다. 책은 읽는 것이고 음악은 듣는 것인데 시각과 청각이 촉각, 미각, 후각까지 자극하며 전방위적으로 울렸다. 귀로는 듣고 눈으로 읽으며 손으로 연주를 따라가고, 어깨는 춤을 추고 마음은 흠뻑 기뻤다. 책 속에서는 그야말로 고전음악의 향연이 더할 나위 없이 펼쳐졌다. 한 곡 한 곡 소개될 때마다 그 음을 귀로 들으면서 읽은 덕이다. 특별히 쇼팽과 슈베르트, 독일과 폴란드, 헤세와 토마스 만 대목에 더 집중했으며 밑줄을 굵게 그어 두었다. 김광균의 이라는 시에는 폴란드에 대한 아련하고 멋진 구절이 나온다. 지난달 우연히 시 창작 강의에 참석해서 또 .. 2022. 6. 15.
[글레노리 노란 우체통] 별들의 시간 두 시간째, 이불 속에서 도토리 알처럼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연거푸 하품이 터지고 있는데도 잠은 현관 밖으로 달아나버린 지 한참 전, 머릿속은 마당의 몇 줄기 찬 바람이 밀고 들어와 씻긴 듯 점점 명료해져만 갔다. 저녁 먹는 중에 틀어놓은 TV 정치토론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밥상에까지 건너온 토론 중의 몇 마디가 귀에 거슬려, 쓸데없이 사견을 붙이다가 급기야 방향이 다른 저 남자와 침 튀기는 말다툼으로 번지고 말았다. 거실에서 방으로 요리조리 어색한 분위기를 피해 다니다가 읽던 책을 덮고 머리맡 스탠드까지 끄고 일찌감치 자리에 누웠다. 돌아눕거나 부스럭대는 소리, 이어폰을 끼고 뭔가 들었다가 말았다가 끙끙거리는 소리, 서로 잠 못 들고 몸을 굴리다가 결국은 내가 못 견디고 일어나 버렸다. 속 좁은 모습들.. 2022. 5.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