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바닥에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신문 몇 장을 폈다. 그 위로 다시 멸치 한 박스를 좌르륵 쏟았다. 모국에 왔다가 시드니로 돌아올 때마다 멸치 손질은 빠질 수 없는 출국 퍼포먼스가 되었다. 4년 전 봄에도 애써 발라가지고 온 두 뭉치의 멸치를 두고두고 잘 먹었다. 그때는 멸치 대가리가 버리기 아까워 따로 담아 가져왔지만 이번엔 포기했다. 공항 검역의 날카로운 눈에 괜한 시비 거리로 거슬렸다가는 자칫 몸통마저 잃을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딸아이랑 마주 앉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손만 바쁘게 움직였다. 무심한 척했지만 며칠 있으면 헤어지는 딸과 그동안 망설이며 못한 이야기가 맴돌고 있었다. 모녀의 속심이 어딘가에 꽂혀 있다가 날 것 그대로 뚫고 나와 찔린다 해도 이야기를 꺼내야만 했다. 심해를 헤매던 무거운 마음들이 그물에 걸려 파닥이기도 할 것이고 또는 요령껏 빠져나가기도 하겠지만, 알뜰한 멸치처럼 궁극에는 마음이 열릴 것이라는 약간의 기대감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밝은 터널이나 건너기 쉬운 진흙밭이 어디 있겠는가. 어쩌면 딸아이는 딸아이대로 갈기갈기 발라져 등뼈가 다 보일 것이고 어미는 그야말로 쭉쭉 찢어지거나 반 토막이 날지도 몰랐다. 갈수록 아이 입담이 날카로워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영문도 모르는 멸치는 할 수만 있다면 귀를 틀어막고 첨벙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수천 리 바다로 마냥 달아나고 싶거나 차라리 멸치가루가 되고 싶다고 아우성을 칠지도 몰랐다.
아이와 나의 설전은 매번 사방으로 튀는 침방울과 날빛 선 눈짓으로 때로 살을 에는 삭풍이 되곤 했다. 말라비틀어지고 건조한 관계 속에서는 깊은 바닷속을 창공의 새 떼처럼 무리 지어 다니던 멸치의 참모습을 기억해 낸다는 것이 요원해 보였다. 그러나 다 큰 딸아이와 나의 공존의 비밀은 만날 때마다 진검승부를 내야 하는 이런 잔소리 시간을 통해서였다. 때로는 그게 깊은 속살을 드러내는 아프면서도 애틋한 시간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느 구석엔가 교묘히 숨어 있던 감정들이 족집게로 집어내듯 드러나기도 하고 어떤 부끄러움은 얼굴 속에 얼른 파묻기도 했다. 내 속에서 나왔다 해도 어찌 저 속을 다 알까만, 우리 앞에 구겨진 폐지는 까만 멸치 똥처럼 점점 쌓여갔다. 정작 멸치는 오롯이 알짜배기만 남아 가는데 우리는 무엇이 남을지 모른 채 멸치 손질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때 아이는 기어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엄마 말은 다 맞는데, 엄마처럼은 살기 싫어.”
나의 주가는 한순간에 폭락되었다. 차라리 말이 틀렸다고 하면 밤새 잠을 뒤척이며 고민이라도 해볼 텐데 나처럼 살기 싫다는 아이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한마디 말도 더 보탤 수가 없었다. ‘시는 왜 쓰지’라는 말만 되뇌며 자꾸 잠기는 목을 큼큼거렸다.
시를 쓰는 멸치 인생이 바다 이야기만 쓸 것이지 왜 하늘과 구름, 태양과 별, 바람까지 넘겨다 봤을까. 바쁘다는 말이 아이에게 그토록 지겨웠을까. 바빠서 죽을 시간도 없다는 말은 친정엄마 전용이었는데 내가 그렇게 되어버렸단 말인가.
막막했다. ‘엄마처럼’이란 말에 걸려 머리만 큰 마른 멸치가 되어버렸다. 인간 멸치는 오류에 빠지고 만 것이다. 서둘러 나의 대가리와 똥을 떼어내고 싶었다. 도대체 그것이 어디에 붙어있단 말인가. 명색이 시인인데 엄마로서는 아이 눈에 영 차지 않았다는 말.
침묵 속에 멸치를 다 발랐다. 몸통을 담아 묶어놓고 보니 버려야 할 부분도 거의 삼분의 일이나 되었다. 좋은 육수를 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버려야 하는 부위들, 그것들을 선뜻 버리지 못하고 오래 만지작거렸다. 시나브로 떠오르는 각이 졌다가 다시 둥글어지는 생각들.
“그래, 그렇구나, 그럴 수밖에 없다 해도 어떡하겠어, 그래도 끝까지 내 길을 가야 되지 않겠어.”
우리에게는 이제 어떤 거리가 필요했다. 서글퍼도 그 거리감을 인정해야 했다. 아이도 나도 그 거리를 견뎌내며 각각 자신의 바다를 건너가야 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서로의 바다를 바라보며 살 것이다. 그 바다에 드리운 수많은 길과 그늘, 깊이와 풍랑을 예의 주시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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