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벽에 드디어 유리 창문이 생긴다. 창문으로 소슬바람과 목향이 와락 안긴다. 유리 닦던 딸아이의 청량한 웃음소리도 창틀을 넘어오고, 큰 유리를 잘라내고 창틀을 끼워 넣던 곤돌라 위 직원도 허리를 펴더니 웃는다. 곤돌라가 흔들릴 때마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높아갔다. 한 시간가량 씨름이 끝났다. 답답했던 방에 근사한 숨구멍이 생겼다.
마무리를 끝낸 직원들이 차에 올랐다. 우리는 숙제 하나 끝낸 가벼운 마음으로 배웅을 했다. 그때 곤돌라 위에서 일하던 직원이 차에서 뛰어 내려오더니 “손 한 번만 잡아봅시다.”하며 딸애에게 불쑥 오른손을 내밀었다 아이도 흔쾌히 내민 손을 잡았다. 가을꽃이 흔들린 듯. 처음 만난 사람들이 겨우 한 시간 동안 무엇이 통했기에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와 손을 잡아보자 하는 걸까, 만약 사랑이 저리 온다면 그것은 필시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둘은 차가 모퉁이를 돌 때까지 서 있었다.
한국에 도착한 지 두어 주 지났다. 추분이라고 안부가 뜨는데 오늘 송도 날씨는 흐림, 약간 쌀쌀. 시월이 두어 걸음 가까워졌다. 긴 팔을 꺼내 입고 몇 평 안 되는 앞마당에 나와 앉아있다. 아파트에서 앞마당이라니, 1층을 고집해서 산 딸아이 덕분이다. 시간을 다투던 서울 생활 가운데 고군분투하며 살아온 지 여러 해, 그동안 고층과 고층 사이에 줄을 놓듯 거미처럼 허공에 방을 들여놓고, 옆도 뒤도 안 돌아보던 세월이었다. 딸애는 지치고 몹시 각박해졌을 것이다. 떠나온 집에 대한 그리움이었을까. 아니면, 넓은 마당을 밟고 살았던 어릴 적 기억이 생각났을까. 은행 빚을 끼고 겨우겨우 장만한 딸애의 1층 집, 그녀의 기민한 선택은 굉장히 신선했다.
작은 집이지만 방 두 개가 있는 복층,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우리 부부를 초대했다. 지난해만 해도 모닝커피를 들고 딸아이네 마당에 앉아있으리라곤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아이의 배포가 두둑해진 이유가 있었다. 주방과 화장실을 고치고 조명을 새로 달고 커튼까지 바꾸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손 하나 댈 데 없는 깔끔하고 완벽한 모노톤 디자인에 우리는 감탄을 연발했다. “수고했다, 수고했어. 웬일이냐. 네가 이런 걸 다할 줄 알고!”
유리창 밖은 가을이 무르익어가고 길거리에는 익숙한 음식 냄새가 넘쳤다. 신도시가 주는 편리함과 매끄러움, 단지를 끼고 오밀조밀한 동네 공원들은 늠름하게 솟은 소나무와 그늘이 적당한 단풍나무들로 어디든 초록 일색이었다.
단꿈을 꾸듯 며칠을 보내고 나니 집 안 구석구석이 보이기 시작했다. 더 자세히 보니 전기 배선공사와 배관, 페인트칠 등 부실한 곳이 한두 군데 아니었다. 못 본 듯, 그녀만 남겨둔 채 우리 부부는 예약해둔 미주 단체 여행길에 올랐다. 3주 후에 돌아와 사용할 간단한 가구 몇 개만 주문해둔 채.
코뚜레가 잡힌 듯 바쁜 여행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PCR 검사를 하니 덜컥 나만 양성이 나왔다. 더구나 기침이 심해서 기관지 통증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몸이 아프니 어설픈 집안 구석이나 돌아다니는 먼지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열흘 만에 털고 일어나 우리는 제일 먼저, 계단을 칠하기로 했다. 갈라지고 패인 빈틈 구석구석, 메지를 한 다음 흰색으로 칠했다. 계단은 두툼한 케이크처럼 단정해졌다. 아이가 직접 했다는 목욕탕 공사는 깨진 타일이 많아 우리 손으로 하기에는 엄두가 안 났다. 나중에 전문가에게 맡기기로 합의했다. 세탁기는 배관의 실수로 밑바닥이 축축해서 실랑이 끝에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예민해진 아이랑 마찰이 자주 생겼다. 따라서 서로 언성도 높아갔다. 경비를 아끼려고 직접 했던 것이 다 헛수고가 되어버리니 속도 몹시 상했을 것이다.
거기에다 이층 방에는 창문이 없었다. 네 장짜리 얼룩덜룩한 긴 유리창은 벽이나 다름없어 햇살만 쏟아져 들어오지 바람 한 점 꿈도 꿀 수 없었다.
몇 달 동안 내가 자야 할 방이라 창문 하나만 내자고 부탁했다. 겨울 추위 때문에 안 된다며 아이는 단칼에 잘랐다. 먼지 알레르기가 심한 나로서는 고양이 털, 이불 먼지, 사람 먼지에 코끝이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하루에 몇 번씩 마대를 들고 엎드려 구석구석 뭉친 먼지를 끌어냈다. 그런 내게 그만 질렸는지 아이는 마지못해 양보를 했다. 어미가 딸을 이겨먹어서 뭐 하랴만.
그렇게 유리 작업이 시작되었다. 예상과는 달리 창문 다는 작업이 간단한 게 아니었다. 곤돌라까지 불렀다. 이층 유리 바깥쪽에 바싹 갖다 대고 먼저 유리 한 장을 통째로 잘라냈다. 그 뚫린 사이로 사람이 들락거릴 수 있었다. 창문을 끼우고 작업을 끝내는 데 삼십 분에서 한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딸애는 고무장갑, 세제를 탄 물통, 긴 장대가 달린 유리 닦이를 챙겨 흔들리는 곤돌라 위로 잽싸게 건너갔다. 오래 계획하는 자와 바로 행동하는 자, 우린 달라도 몹시 달랐다.
겹겹이 때가 쌓인, 결코 닦인 적이 없는 바깥 유리 얼굴을 비눗물로 빡빡 밀었다. 그리고 고무 패드로 훑어내기를 열 번 정도 반복했을까, 유리가 드디어 맑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얼떨결에 박수를 쳤다. 그 흘러내리는 구정물 사이로, 거지발싸개 같은 며칠 동안의 거친 말들도 씻겨 내려가고 있었다. 말도 굳어지면 때가 심해지나 보다. 오래 떨어져 있던 시간 속에 쌓인 서운한 감정이며 불통인지도 몰랐다.
유리창 너머로 딸아이 눈매가 환했다. 닦인 유리만큼 헤어진 사랑이 돌아온 것일까. 우리는 뚫린 마음 사이로 손을 잡았다. 손바닥만 맞잡아도 세상이 이리 통하는 것을, 바람에 흔들리는 가을 잎들이 아프게 투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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